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od night and Aug 24. 2023

살면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나만의 가치

Snoot 7-8월

'가치'란 단어, 평소 입에 올리기 뭔가 거창하다. '타협할 수 없는'이란 수식어에 '도저히'라는 품사까지 붙으니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잔뜩 벼려진 철학 같은 걸 말해야 하나 고민되는 걸 보니, 내가 경멸하던 어른의 진지함이 어느새 내것이 됐나 싶다.


20대 중반에 가장 염세적이고 무기력한 시기를 보냈다. 딱히 힘든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미숙하고 시야가 좁아, 낮은 허들에도 매번 걸려 넘어졌다. 부모님이 해주는 뜨신 밥 먹고 등 따습게 자는 주제에 미래에 대한 불안, 사회에 대한 불만에 절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뒤늦은 사춘기 혹은 막차 중2병, 그런 거였나 싶은데 암튼 내 안의 세계는 말 그대로 황무지였다. 어른이 되기 위한 아무 준비도 안했는데 갑자기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어 무작정 휴학을 했다. 그냥 내 방에 틀어박힌채 난 뭘 하고 싶지, 대기업에 이력서를 돌리는 것이 내가 바라던 미래인가, 별 소용도 없는 고민으로 반 년을 마모시켰다.


오직 미국 드라마 <오피스>만 정주행 했는데, 세 번째 보니 대사도 외울 정도인데도 또 보니 또 똑같이 웃겼다. 장면 전환 사이에 암전이 될 때 잇몸을 드러내고 웃는 내 얼굴이 까만 노트북 화면에 비쳤다. 뭐야.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웃을 줄 알면서 뭘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거지? 답도 안 나오는 고민으로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하게 매일 시간을 버리고 있구나. 그렇다고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건조한 내면에는 모종의 변화가 꿈틀거렸다.


한 번 배꼽을 잡고 웃을 때마다 마음 속에 봄비 마냥 평화가 번졌다. 봄비가 잠든 생명들을 다정하게 깨우듯이 나는 고요한 회복을 체험했다. 지금도 가끔 두문불출, 감자칩 먹으며 유튜브만 보다 고독사 사체로 발견되는 나를 상상한다. 멀쩡히 회사도 다니고 꼬박꼬박 세금도 내는데, 스트레스에 공격받는 뇌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부정회로를 돌린다. 하지만 막상 씹던 감자칩을 흘릴 정도로 웃긴 영상을 보면 어두운 단상을 금붕어처럼 잊는다. 한참 웃다가 이것만 보고 설거지도 하고, 글도 쓰고, 주말에 만나고 싶은 친구에게 연락도 해야지, 조촐하게 결심한다.


이번 여름 몬트리올 여행 중에 쇼핑몰에 있는 장난감 가게에서 <What do you meme>이라는 이름의 <오피스> 소재 보드게임을 발견했다. <오피스> 속 장면과 대사가 적힌 카드 수십장을 가지고 하는 게임이었다. 좀 비싸서 살지 말지 서성거리며 가게를 구경하는 척, 직원들을 관찰했다. 하나같이 자그마한 몸집에 안경을 끼고 오타쿠 같은 대사를 읊는 <빅뱅이론>에서 튀어나온 캐릭터들 같았다. "그래서 너 어제 [뭔지 모를 보드게임 이름] 해봤어?" "응, 근데 [대충 보드게임을 평가하는 자기들만의 언어]더라." 드라마 속에 들어온 것 같아 혼자 신기해 하다 보니, '아무리 시궁창 같은 현실도 시트콤이라 여기고 버텨내자', 내 신조를 염불처럼 다시 읊었다. 이건 부적이다 생각하고 <What do you meme>을 샀다. 서울 집에 돌아와 경건하게 포장 비닐을 찢고 안에 있는 미니 이젤을 꺼내 책상 위에 두었다. 그리고 카드들을 매일 바꿔가며 올리기로 작정했다. 즐거운 금붕어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타격감 없이 헤쳐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동물을 기르지 않는 삶에 대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