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인천, 디트로이트, 그리고 몬트리올
새벽 5시에 일어나 짐을 다 싸고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호텔 방의 전화기가 울리길래 수화기를 들었더니 바로 끊어진다. 호텔에서 오늘 리스케줄링 된 델타 항공편 승객들에게 모닝콜을 돌리는 모양이다. 리셉션에서 모닝콜 서비스를 받아본 건 처음이라 신기했다. 설마 오늘은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디트로이트 공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이상 비행편에 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거야(복선).
몬트리올 공항까지는 환승 대기 시간 다섯 시간을 포함해 꼬박 24시간 정도가 걸렸다. 환승 도시인 디트로이트로 향하는 델타 비행기 안에서 나는 네 시간에 한번씩 작년에 미국에서 사온 수면유도제를 복용하고, 비행기 TV에 연결한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에서 흘러 나오는 드라마 음향을 백색 소음 삼아 내내 잠에 취해 있었다. 이 방법으로 내 양 옆에 앉은 모르는 할아버지와 아저씨를 귀찮게 하지 않고 최소한의 화장실 왕복으로 열 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비행기 TV에 <라스트 오브 어스>가 있어서 전 시즌을 재생했다. <만달로리안>에 이어 참된 아버지의 상징이 돼 버린 페드로 파스칼과 수염이 부숭부숭한 아저씨들이 많이 등장했다. 게임 UI와 비슷하게까지 연출한 화면에 감탄하며 재밌게 보고 있는데, 커플로 나오는 중년 남성들의 베드신이 나왔다. 약간 눈치가 보여 혼자 옆자리를 흘긋 보니 내 오른쪽에 앉은 아저씨는 자기 앞 화면 속 이름 모를 애니메이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식사 시간에 왼쪽에 앉은 할아버지는 한국인 승무원에게 “포도주라는 걸 맛 볼수 있냐”고 반말로 물었다. 로보캅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레드와 화이트 중 뭘 고르겠냐고 승무원이 물었지만 할아버지가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자, 승무원은 두 종류 모두 조금씩 따라 줄테니 맛을 보라며 종이컵을 건넸다. 할아버지는 잔을 받아들고 몇 모금 홀짝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분 뒤 쓰레기를 수거하러 온 승무원에게 할아버지는 컵을 도로 건네며 “이게 포도주여?”라고 물었다. 승무원은 여전히 로보캅처럼, “네 원래 그런 맛이에요”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꾸준하게 반말을 건넸고 생전 처음 맛 본 ‘포도주’가 소문과는 달리 맛도 없어 기분이 상한 듯 보였지만, 서비스와 설명을 세심하게 제공하면서도 한국 국적기 승무원과 다르게 고압적 어투와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는 승무원에게 무엇을 더 요구하지는 않았다.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5분 만에 미국 입국 심사를 마치고 더 이상의 딜레이나 취소 없이 연결편에 탑승해 몬트리올에 무사히 도착했다. 꼬박 하루를 다 써 이동했지만 날짜는 여전히 8월 2일이었다. 현지가 운반을 부탁한 쥐포가 트렁크에 들어 있었기에 세관 신고서에 dried fish가 있다고 적었다. 세관 조사원은 빨간 색연필로 내 세관 신고 서류에 대문짝만하게 필기체로 dried fish 라고 적었다. 현지가 사는 아파트 복도의 체커보드 문양의 바닥과 핑크색 벽이 조합된 복도가 <트윈픽스>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미국 북동부-캐나다 남부 위도에 관련된 콘텐츠는 <트윈픽스> 하나밖에 몰라서 조금이라도 비슷한 요소를 보면 무조건 <트윈픽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질적인 인테리어나, 미주 지역 산맥에 걸린 안개나, 침엽수림과 그 나무 아래 스웨터 입은 백인을 보면 그냥 다 <트윈픽스>라고 생각한다. 쿠퍼 요원은 없었지만 <트윈픽스> 속 마을처럼, 몬트리올은 조용하고 깨끗한 인상의 동네였다.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바로 바베큐 짐을 한가득 싸서 몽로얄 파크로 향했다. 해가 지기 전에 공원에 도착해 모든 걸 세팅하고 고기를 구워 먹어야 한다며 홈스테이 집주인과 같이 머무는 친구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몽로얄 공원의 듬성듬성 있는 바베큐 테이블에는 저마다 가족, 친구들과 놀러온 사람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바베큐 테이블 말고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장소는 가족 단위로 사진을 찍는 인파가 북적대는 인공 폭포 구역과, 하늘을 노을로 물들이며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빛이 밝게 비치는 비탈길 잔디밭이었다. 몬트리올 시민들은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밝게 비치는 햇빛을, 김장처럼 잔뜩 저장이라도 해야 하는 듯이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마치 이 여름이 끝나면 차디찬 흙 속에 묻혀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김장 장독 마냥.
가져간 음식이 너무 많아서, LA 갈비와 쌀밥에 김치까지 실컷 먹고 옥수수에 이것저것 발라 굽는 중에 해가 져서 밤이 된 데다 쥐포는 기억도 안 날만큼 배가 불렀다. 한국에서 가져온 dried fish는 그렇게 몬트리올 시내 아파트의 냉장고 어딘가에 조용히 잠들었다. 후식으로 스모어까지 먹고 난 우리는 가져온 카트에 그릴과 남은 음식을 다 욱여 넣고, 분리수거가 필요 없는 캐나다의 공공 쓰레기통에 남은 쓰레기를 전부 집어 넣었다. 우당탕탕 소음을 내는 작은 철제 바퀴의 카트를 끌고 몽로얄 산(오름에 가까운) 정상으로 향했다. 널따란 광장에 올라서서 우리는 시티팝 음악 앨범 표지 같은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 보았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올라와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첫 날이라 당일에는 잘 몰랐는데 거기 있던 사람들의 인구밀도를 떠올려 보면 몬트리올 시내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와 있었던 거나 다름 없었다.
홋카이도에 갔을 때도 생각했는데, 어떤 도시의 관광 포인트가 야경이라는 것은 밤에 별달리 할 일이 없는 도시란 뜻인 것 같다. 굳이 높은 곳에 올라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인간들이 켜 둔 불빛을 바라보는 일이 그 도시의 가장 재밌는 일 중 하나라니, 그 시간에 다른 기깔난 재밌는 일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닌가. 그 동안 여행지를 고를 때는 볼거리, 할거리가 많은 도시들을 주로 고르곤 했었다. 몇 년 전부터는, 시간도 모자라고 여행에 대해 계획을 세울 정도로 구체적인 열망이 생기지도 않았다. 메트로폴리탄들에 가서 미술관 투어를 하고 싶다든지, 좋아하는 영화 감독들의 고향에 가보고 싶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살면서 그런 생각을 거의 해보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시간이 생기면 무조건 휴식만이 간절했다. 동시에 매일 사람에게 시달릴 수록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소중해 진다는 걸 깨달았다. 일도, 휴가도,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덧없는 자의식 충족형 여행보다 이젠 내가 얼마나 편안하고 즐거울 수 있는지 만 중요하다. 아기자기한 ‘노잼’ 도시 몬트리올에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아무 이야기나 떠들고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시는 시간이 진짜 휴식이라고 느꼈다. 첫날부터 나는 이 여행이 얼마나 단조롭고 행복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