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토요일 몬트리올 시내
몬트리올 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de Montréal)은 우리의 거점에서 걸어서 20분 거리, 버스로 5분 거리에 있었다. 오후 반나절 스파에서 쭉 보내기로 한 날이라, 오전에 미술관을 보고 오겠다며 보리언니와 집을 나섰다. 전날 밤 현지와 같이 이불을 덮고 바닥에 누워 데이팅, 남자, 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떠들다 잠들었다. 그 중 한 소재였던 ‘팀 홀튼에서 절대 커피를 사 마시지 않는 남자’에 대해 먼저 잠든 보리언니에게 복기해 주며 찬찬히 미술관 방향으로 걸었다. 스노비즘, 자의식 과잉을 가진 사람과의 관계를 선호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결국 사람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 옳고 그름은 없으며 나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당연한 이야기들인데, 이런 이야기는 아무리 반복해도 왜 할 때마다 재밌는지. 팀 홀튼 이야기 하니까 도넛에 커피가 무지 먹고 싶어 졌다. 서울에서는, 지금은 한풀 꺾인 느낌이지만 한 때 도넛 가게들이 힙스터 게임을 주도 했는데, 그 중 어느 곳도 ‘진짜 맛있는 도넛’이 없었다. SPC 계열사는 몇 개월 전부터 (되도록)불매 중이긴 하나 도넛은 던킨 도넛과 크리스피 크림 정도의 맛을 내는 가게는 아직 없다는 이야기까지 할 무렵 미술관에 도착했다.
규모가 작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중세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꽤나 알찬 소장품들에 둘러 싸여 나는 익숙한 만족감을 느꼈다.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음식을 사 먹을 때처럼, 서양 문화권에서 ‘Fine art’라는 이름이 보장해 주는 일정 수준의 규격화 된 만족감이 있다. 매우 놀랍거나 진귀한 경험은 아니지만 한없이 지루하거나 비루하지도 않은. 스타벅스의 바닐라 라떼 같은 맛이랄까. 몬트리올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 바로 옆 길드Guilde라는 갤러리도 잠깐 들러 보았는데, 동시대에 활동하는 캐나다 작가들을 후원하는 조합 같았다. 동시대 작품에 대해서는 어떤 기준으로 가치를 판단해야 할지가 가장 어려운데, 지금 조명 받고 있는 북미 작가들이 모두 네이티브 아메리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는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갤러리들이 그런 소재만 편집해서 하이라이트 하고 있다는 점에 말이다. 이런 기획으로 너희 백인 DNA에 새겨진 폭력을 속죄할 수 있겠다고 믿냐, 라는 냉소적인 마음을 남기고 길드 갤러리를 떠났다. 삿포로 치토세 공항에서 ‘아이누 풍’으로 그려진 여우, 곰 등의 벽화를 봤을 때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오후에는 자가용이 있는 현지의 친구와 합류해 스파에 갔다. 마사지도 받을 수 있는, 심즈Sims에서 건설할 수 있는 그런 스파였다.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끌려가 온탕, 냉탕에 담가졌다 온몸이 새빨개지도록 때수건에 빡빡 밀렸던 나에겐 미국 드라마나 리얼리티쇼 속 ‘스파 데이’만큼 이질적인 게 또 없었다. 그걸 내가 직접 체험하다니, 신기하고 들뜨는 내색을 내심 감추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여러 탕과 사우나를 들락거렸다.
예약한 시간이 되어 담당 마사지사를 만났는데, 인자한 버전의 매즈 미켈슨처럼 생긴 아저씨였다. 태국 여성들의 거친 손길에 익숙해진 나에게 그의 마사지 압력은 너무나 약하기 그지 없었다. 5년쯤 전인가, 방콕에서 쇼핑몰에 있는 마사지샵에 들어갔을 때, 내 담당 마사지사는 “베리 스띠프! 베리 스띠프!”라고 소리 지르며 내 승모근을 갈가리 찢어 발겼다. 그녀는 내 어깨가 생물 오징어처럼 흐물흐물 해질 때까지 나를 가게에서 내보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마사지 압력이나 디테일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귀찮았고, 한국인인 내가 스파에서 백인 남성에게 마사지를 받는다는 사실이 자본주의라는 전쟁터에서 권력을 쟁취한 기분도 좀 들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마사지사가 황송할 정도로 친절했던 데다 미리 현금을 챙겨가지 않아서 마지막에 ‘나가면서 카운터에 팁 맡길게’라는 거짓말로 사과까지 했다. 아무리 자주 접해도 매번 나는 팁 문화가 익숙해 지지 않았는데, 최저시급으로 따지면 우리 나라의 1.5배는 되는 국가에 와서 내가 왜 웃돈까지 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안방 여포니까, 직원들이 안 볼 때 카드 리더기에서 몰래 팁 $0 옵션을 재빨리 누르거나, 눈을 피할 수 없을 땐 가장 낮은 비율의 옵션(대부분 10%)을 고르곤 했다.
저녁은 기보 오렌지 줄렙Gibeau Orange Julep에 가기로 했다. 푸르스름한 밤하늘 색이 번져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서 있는 동그란 오렌지 색 건물을 바라보니 어린 시절 접했던 비주얼들 속 ‘저 곳은 어떤 세계일까’ 상상한 꿈 속에 발을 들인 것 같았다. <토이스토리>에 나오는 피자 가게 같기도 하고 중학생 때 열심히 사 모았던 잡지 <보그걸> 의 패션 화보에서, 깡마른 소녀 둘이 푸틴을 먹는 척 하며 앉아있는 남루한 패스트푸드점 같기도 했다. 이 곳의 간판 메뉴는 가게 이름에도 써 있는 오렌지 줄렙인데, 칵테일 바에서 민트 줄렙만 마셔본 나는 ‘줄렙’이 시럽이 들어간 미국 남부의 전통 음료를 뜻한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기보의 오렌지 줄렙은 신 맛이 전혀 없고, 갈아 넣은 오렌지 즙에 많은 양의 시럽과 밀크 파우더 혹은 요거트 파우더 같은 것을 섞은 맛이 났다. 여긴 미국이 아님에도 이건 완벽한 미국의 맛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