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5일
전혀 새롭지 않은 사실이 새삼 강렬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음악에 대한 나의 사랑도 그렇다. 강력한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는 공연에 다녀오면 특히 그렇게 되는데 작년 여름 오셰아가 축제 이후, 올해 엔시티드림의 <드림쇼3> 콘서트에서 나는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군, 느꼈다. 돌아보면 내 안에 무언가를 형성했다 싶은, 이정표가 된 음악을 다섯개 정도 지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한 개씩 꼽아보았다.
첫번째는 H.O.T. 의 <캔디>. H.O.T. 의 1집 앨범은 내가 처음으로 가진 음반이다. 아마 10살 정도의 나이이었던 거 같은 데 요즘 어린이들도 케이팝 아이돌 노래를 좋아하는 걸 보면 그 나잇대와 그 음악이 뭔가 상관 관계가 있는게 틀림 없다. <캔디>는 데뷔 앨범의 타이틀 곡이 기도했고 <전사의 후예> 보다 내가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어서 가장 좋았던 거 같다. 하지만 따라 부르지 못해도 <전사의 후예>도 만만치 않게 많이 들었는데, 평생 힙합을 좋아하게 되리란 걸 이 때 알았어야 했다. 인간의 뇌는 10살에서 13살 사이에 좋아하던 음악을 평생 선호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실상 성인이 되어 새로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좋아하던 음악 혹은 그 연장선의 장르만 계속 좋아하게 된단다. 문방구에서 H.O.T.의 사진을 사고, 아이돌 잡지 <파스텔>에서 오린 사진들로 네모난 필통을 도배하곤 했었다. 용돈이 많은 친구들의 화려한 컬렉션을 보며 부러워 하기도 했는데 아직도 영풍문고와 교보문고를 돌며 아이돌 사진이 들어있는 음반을 사모으는 나 자신을 보면 한 인간의 어떤 본질이란 참 올곧은 것이군, 싶다.
두번째는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Independent women part.1>. 작년 오셰아가를 다녀와 쓴 일기에 초등학생 때 부모님의 강남역 신나라 레코드 구매 컬렉션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것이 어떤 가사들이고, 어떻게 파생된 음악들인지 당연히 초등학생이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 주제에 가사집을 읽으며, 따라부를 수 있게 될 때까지 노래들을 반복해 들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우리 집에 케이블 TV가 연결 되었다. MTV의 시대가 시작됐다. 음악 세상에서가 아니라 내 세상에서 말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를 필두로 나는 2천년대 초반의 팝음악의 세계에 푹 빠졌다. 아니, 푹 빠진 수준이 아니라, 팝 음악의 신(악마든 잡신이든 상관치 않았다)에게 내 영혼을 팔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1999년,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기념비적 앨범 <Writings on the wall>은 차트를 '석권'하고, MTV를 도배하고 있었다. 며칠 몇시든 MTV를 틀면 <Bills, bills, bills>나 <Say my name>의 뮤직 비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음악은 스피어스나 아길레라의 음악과는 좀 달랐다. 10대로 막 접어들던 내가 이해하기엔 더 어려웠지만, H.O.T.의 음악으로 다져진 귀를 갖고 있던 내게는 더욱 더 매력적인 비트였다. 귓전을 때리는 낯설면서도 완벽한 리듬과 멜로디 라인에, 나는 늘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비디오가 나올 때마다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음악을 주의깊게 들었다. 그 중 <Independent women part.1> 'Charlie's Angel OST' 라는 길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영어가 잔뜩 쓰인 곡의 뮤직 비디오는, 신기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한 영상의 향연이었고 여기에 왜 배우들이 나오는지(영화 사운드트랙의 개념을 모르던 때였다), 다소 웅얼웅얼 들리는 듯한 가사가 무슨 뜻인지, 따라 부르지도 못하는 이 노래가 왜 이렇게 좋은지 궁금했다. 얼마 전에 까르띠에 매장에 혼자 가서 시계를 샀는데 문득 MTV에서 <Independent women part.1> 뮤직 비디오를 보던 열한 살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중고등 학생 때는 정말 음악을 많이 들었다. 이 즈음 친구들과도 늘 음악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는 학교에서 CD를 돌려 듣고, 서로 구워(!)서 선물하고... 이 때부터는 부모님이 사다주는 음반이 아니라 친구들과 강남역에 직접 나가서 산 음반들을 들었다. 보아의 일본 앨범 같은 것은 중학생인 우리에겐 구하기 어려운 '희귀템'이었다. 그러다 1,2년도 지나지 않아 모두가 자기 MP3 플레이어를 하나씩 갖고 있었다. 내가 처음 가져본 MP3 플레이어는 아이리버였던 것 같다. 모두가 자기 이메일 주소를 갖게 되고, 버디버디로 하루종일 채팅을 하고, 음원을 다운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독서실에 모여 노가리를 까던 우리의 MP3플레이어 속에는 엠플로, 에이브릴 라빈, 에픽하익 같은 가수들의 음악이 빼곡이 채워지게 되었다.
은광여고의 재학생이 된 내겐 검은색 아이팟 나노가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며 나는 좀 다른 음악 취향을 갖게 되었다. 초중학생 때 MTV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듣던 음악에서 점점 인터넷 커뮤니티적 취향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시기였다. 교보문고에 가서 <보그걸>을 사 모으던 이 때의 나는, 미샤 바튼의 인터뷰로 처음으로 브릿팝이라는 장르를 알게 되었고 오아시스라는 이름의, 그렇게 위대하고 유명한 밴드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따. 검색의 검색을 하며 찾아 듣게 된 내 노래 리스트는 콜드플레이, 위저에서부터 고릴라즈까지, 마치 밴드 음악을 호딩하는 사람의 보관함 같았다. 그 중에 내 뇌리에 가장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음악은 일본 밴드 블루하츠의 <린다 린다 린다>였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 글을 끝맺음 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단 것을 깨달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 압박감에 글을 임시저장 한 채 드러누워 맘처럼 쓰여지지 않는 문장 몇개를 쥐어 짜내다 유튜브를 켜고 완전히 다른 짓을 하다가 잠들었겠지만, 일단 진정하고 업로드를 한다. 음악 오타쿠의 인생 이야기는 곧 이어서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