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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Oct 06. 2024

일본, 여러 해에 걸쳐 여러번

2편

기록을 게을리 하는 사이 출장으로 일본을 두 번이나 더 다녀왔다. 3분기 동안은 체력적으로도 괴로웠고 정신적으로도 리소스가 모자라 그간의 여행에 대한 기억도 좀 흐려졌지만, 최선을 다해 남아 있는 인상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지금 손가락을 쥐어 짜내고 있다. 


일단, 2024년 6월의 나고야행은 오타쿠 여행이었다. 나고야의 반테린돔에서 열리는 엔시티드림의 <드림쇼3> 공연을 보기 위해서 간거였다. 아이돌의 해외콘을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경제적&시간적 여유에 대한 부러움) 궁금해하곤 했는데 그게 나였다. 경제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 둘 중 하나라도 여유가 있으면 다른 하나는 쥐어짜낼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고야에 대한 내 인상은, 관광도시는 아니고 한국으로 따지자면 포항 내지는 세종시 같은 느낌이라, 콘서트가 없었다면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계기로 친구들과 처음 가 보는 도시를 여행할 수 있는 건 흔치 않은 행운이었는데, 그 콘서트를 자비로 비용을 감당해 갈 만큼 관심 있는 친구들이 있고, 그 때에 시간을 맞출 수 있고, 도시나 콘서트에 대한 감상을 서로 나눌 때(그리고 그 외 일일히 기록하기도 힘든 각종 잡담과 농담과 웃음거리들) 같은 맥락에서 비슷한 레벨의 웃음을 표현하는 일행이라는 점, 최소한 세 겹의 행운이 겹친 것이다.

4만명이 들어가는 반테린 돔 구장의 시야가, 좌석 위치에 상관없이 이렇게 전반적으로 다 좋을 수 있고, 5층 의자가 이렇게 앞으로 쏠리지 않을 수 있다니(!), 콘서트장의 음질이 이렇게 깨끗하게 들리다니, 일본인들은 이렇게 좋은 구장에서 야구와 콘서트를 보고 있었던 것인가 문화충격을 받았다.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문라이트> 무대를 하는 엔시티드림 멤버들이 짓는 미소가 전광판을 가득 채우자, 여름과 청춘에 대한 내 기억이 조작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내가 보내온 청춘 속엔 한번도 없었을, 청량한 아름다움에 대한 노스탤지어 같은 것이 생겼다.

장어덮밥, 오구라 토스트, 닭날개 튀김 등 하나같이 고칼로리에 기름진 나고야의 명물 음식을 매 끼니 챙겨 먹으며 초여름 날씨를 즐겼다. 나고야는 일본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도시이고 '여자들이 가장 못 생긴 도시' 1위를 차지한다고 했다. 남성 성비가 절대적으로 높아 코르셋은 커녕 머리조차 안 감고 다녀도 늘 여성들에 대한 연애/결혼 시장의 수요가 넘친다고. 꽤나 일본스러운 앙케이트라 생각했다.


작년 9월에 갔던 오사카-교토 여행 때도 엔시티가 콘서트를 하고 있었다. 의도하거나 그 콘서트를 보러 간 것은 아니었는데 그 때는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친구와 교토역 근처에 숙소를 잡고 불타는 것처럼 더운 교토 시내 그리고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돌아다녔다.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닥 깊지는 않아 유적지는 경치 구경 삼아 다녔는데, 교토 시내에 분위기 좋은 다이너와 바가 많은 것에는 관심이 쏠렸다. 다음 번에는 여러 명의 일행을 구해 교토로 푸디 여행을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가는 날은 근처에서 엔시티(전체) 콘서트가 있었는데, 10만명이 들어가는 스타디움에서 한다더니 정말 시내를 통과하는 지하철과 유니버설 스튜디오 안에 온통 엔시티 팬걸들이 깔려 있었다. 해리포터 구역을 돌아다니고 있던 오후 시간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한 폭우가 쏟아지며 땅까지 흔들릴 듯한 뇌우가 내리쳤고, 기념품 상점 안의 직원들은 안전조치라며 손님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낙뢰를 맞을 수 있다고 했다. 재난 대비가 잘 되어 있는 나라는 놀이공원에도 프로토콜이 있구나, 약간 놀라며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인터넷을 보니 같은 시각 엔시티 콘서트장에는 발목까지 물이 차올랐는데 그대로 계속 콘서트 진행중이라고...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그냥 시스템이 잘 돼 있는 곳이었던 거였다. 천둥번개는 멈췄지만 강수량은 줄지 않아 아주 비싼, 해리포터 로고가 쓰인 망토 모양의 우비를 사입고 귀가했다. 


올해 두 번의 도쿄행은 출장이었다. 9월 중의 거의 절반을 도쿄에서 보냈다. 한 번은 팀 오프사이트였고, 한 번은 혼자서 게임 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해 갔는데, 팀 오프사이트 바로 일주일 뒤 다시 출국하려니 곡소리가 날 정도로 힘들었다. 출장 일정의 마지막 날 긴자 도버스트릿에 갔다. 거진 한 1년 전부터, <더모닝쇼> 속 그레타 리(작중 캐릭터명 스텔라 박)이 입은 옷을 계속 검색해 봤다. 최근 본 모든 픽션을 통털어 스텔라 박은 내가 가장 현실적으로, 가장 깊게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방송국의 중요한 계약을 따내기 위해 스텔라가 백인 남자 두 명과 술 내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백인 남자들은 스텔라의 '배짱'을 시험하기 위해 딜을 걸고 독주 마시기 대결을 제안했고 이 말도 안되는 요구를 받아들이는 스텔라의 상황과 감정은 하이퍼리얼리즘으로 선명했다. 회사의 명운보다, 여성이자 아시아인으로서, 뉴스 보도국장 자리를 맡은 스텔라의 자존심이 예리하게 나를 찔렀다.

간신히 기절하지 않고 햄튼의 파티장으로 돌아온 그녀가, 뒤에서 사장이 뻘짓하고 있던 탓에 그 딜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안 순간 참았던 화를 터트리는 모습은, 내가 그간 봐온 드라마 명예의 전당을 만들어 영원히 보존하고 싶은 클립이었다. 구글에 검색해 보니 <더모닝쇼> 속에서 스텔라 박이 입은 옷은 대부분 사카이였다. 직구 사이트에서 장바구니에 봄버 재킷과 스커트 몇 가지를 담았다가 환율을 계산하고 다시 뺐다를 반복했다. 도버스트릿에 가서 그 옷들은 다 한번씩 입어 보았다. 가격표를 뒤집어 보니 엔화 환율로는, 달러 환율보다 훨씬 저렴했다. 게다가 도버스트릿은 면세 구입이 가능했다. 

나는 맨해튼에 살지도 않았고 그렇게 연봉이 높지도 않아 가능한 한 제일 저렴한 옵션을 찾아 간신히 한 벌의 사카이를 살 수 있지만, 심정적으로 스텔라 박에게 몇 발자국 뚜벅뚜벅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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