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인 영어가 따로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영어교육정책은 180도 선회하게 되었다. 글쎄, 그걸 180도 선회한다는 물리적 방향으로 묘사하는게 적절한 표현인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문법중심에서 실용중심으로 교육정책의 중심이 옮겨졌다는 것을 두고 한 표현인데, 과연 문법중심의 교육과 실용영어교육은 그렇게 서로 상반되는 것일까?
언어는 기본적으로 실용적이다. 이미 실용적인 것을 어떻게 다시 실용적인 것으로 교육하겠다는 것일까? 이런 말이 내게는 망치나 숟가락을 좀 더 실용적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맥가이버 칼처럼 드라이버, 송곳, 톱, 캔따기 같은 잡다한 기능을 결합한 망치를 하나 만들었다고 치자. 결과적으로 망치에 여러 가지 부가적인 기능이 생기겠지만 아이러니하게 못 박는데는 시원찮은 망치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실용을 강조하는 한국의 영어교육이 그렇다.
일단 실용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자. “실용적”이라는 말은 당장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에 그 최우선의 의미를 두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많은 사람들이 10년 공부하고도 외국인과 간단한 대화조차 어려워하는 “문법중심” 영어교육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는 말이 증언처럼 들려온다. 그런 현실을 더 이상 목도하기 어렵다며 정부와 학교에서 내세운 것이 이른바 “실용적인” 영어교육이다. 실용적인 영어교육은 이전 “문법” “구문” 중심 교육에서 “회화” “토론” 중심의 영어교육으로 바뀌었다. 대화와 토론을 강조하면서 갑자기 대학에서는 원어민들의 강좌가 늘어났고, 학생들도 복잡한 문법을 탈출하고 훨씬 더 재미있는 대화 중심의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실용을 이유로 강의시간은 수없이 많은 미드와 헐리우드 영화 엠티비의 노래들이 보조자료라는 명목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준동사의 구문을 분석해야 하는 문법수업에 비해, 실용영어를 표방한 영어수업들은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수업자료는 재미있게 되었다. 더욱이 많은 기업체와 공공기관에서 지원자의 영어능력을 거의 오로지 토익중심으로만 평가하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에게 실용적인 영어란 곧 토익점수와 직결되는 영어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 취업에 도움이 되는 것만큼 실용적인 것이 또 어디 있으랴 하는 식이다. 학생들은 이제 취업에 도움이 되는 시험영어가 가장 실용적인 영어라고 믿고 또 그러한 학생들의 믿음에 부응하는 대학이 되기 위해, 많은 대학들은 이전의 교양영어의 커리큘럼을 이른바 실용적인 영어, 곧 토익과 토플과 같은 영어시험을 준비하는 과목의 수를 계속해서 늘려나가고 있다.
시험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실용적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라면, 그러한 공적인 시험을 치르지 않는 수많은 지식과 학문들은 다 비실용적이라는 말인가? 다시 돌아가서 문법이 정말 실용적이지 않은지의 문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한국의 현실, 그것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번 생각해보자. 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던 평범한 시민이 외국인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한달에 한번이나 될까? 혹은 1년에 한번? 토익 시험을 본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시험전에 영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에 관한 설문이 나온다. 한달에 몇 번 혹은 1년에 몇 번 하는 식이다. 거기에 매일 영어를 사용한다고 체크할 수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가 되어간다고 하긴 하지만, 일상적인 평범한 생활 속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기회는 좀처럼 흔하지 않다. 정말 시험이라는 특별한 계기가 아니라면 영어를 쓸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좀더 정확하게는 영어로 대화를 할 기회가 별로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화에 국한되지 않고 언어생활 전반으로 확대하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말하는 영어를 사용할 기회는 좀처럼 많아지지 않았지만, 읽는 영어를 사용할 기회는 사실 이미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다.
인터넷 웹페이지의 80퍼센트 이상이 영어로 이루어져 있고, 간단한 전자손목시계 하나를 사도 매뉴얼은 영어를 비롯 다양한 영어로 쓰여져 있다. 국내에서 구입하기 어려운 책은 아마존으로 구입하는데, 당연히 웹페이지는 모두 영어로 되어있고, 교보문고에 외국서적코너에는 더글라스 케네디의 신간이 미국에서와 동시에 출간될 정도로 많은 책들이 나온다. 이전 한자가 병기되던 자리에 영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어느 관광지를 가도 영어로 된 안내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고, 당신의 스마트폰을 몇 번 터치하면 뉴욕타임즈나, 가디언, 뉴요커, 워싱턴 포스트와 같은 영자신문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온다. 주변에 영어로된 읽을 거리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한국의 상황을 정리해서 말해보자면, 한국은 아직 생활속에서 영어를 말해야 하는 것만큼 국제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영어를 읽는 차원에서 한국은 이미 영어에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대화는 굳이 문법을 따지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읽는 것과 구문파악은 문법을 모르고서는 불가능하다. 한국의 현실을 생각했을 때, 과연 영어회화와 문법 어느 것이 더 실용적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신이 배운 영어를 활용하지 않으면서 더 실용적인 것을 배우려고 한다. 그럼, 그렇게 “실용적인” 영어를 배우게 되면 정말 그 실용적인 영어를 잘 활용하게 될까? 영어가 실용적이지 않게 된 것은 실용적이지 않은 문법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환경이 별로 영어를 사용할 만큼 실용적인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것이 말이 되었건 문자가 되었던 모두 실용적이다. 그걸 두고 문법은 실용적이 아니고 말하기가 실용적이다 라고 단순하게 구분지으며 학습의 방향을 획일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주 무식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발상의 근원과 영어사교육시장은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외국인을 만나 대화를 능숙하게 나누지 못하면 한순간에 그동안 배운 영어가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요란스럽게 문법중심의 영어를 탓하는 영어학원의 광고에는 그동안 문법으로 돈을 벌만큼 벌었다가 이제는 회화를 팔아서 돈을 좀 벌어보려는 의도가 추하게 드러나 있다. 정부에서든 학원에서든 혹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될 학교에서도 대한민국의 모든 영어수험생들이 외교통상에서나 필요할 법한 영어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가 익스플로러를 사용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려면 빌게이츠처럼 프로그램을 짜고 세르게이 브린이나 래리 페이지처럼 검색엔진의 알고리즘을 알고 있어야만 할까?
내 생각에 문법을 공부하고 구문분석을 공부하는 것도 충분히 실용적이다. 그걸 사용하지 않으면서 실용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망치를 두고 벽돌로 못을 박으면서 망치가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용적인 것의 구분을 떠나서 우리는 이미 자기에게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미 한국의 영어는 과잉이다. 단지 올바른 방법으로 그것을 쓸 줄 모르는 것이 문제이지, 영어가 “더”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영어를 “더” 강조해서 영어와 관계없는 많은 중요한 사회적 결정을 내린다. 좋은 고등학교에 가거나,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좋은 직장을 얻는다. 사실, 그건 굳이 영어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들도 아니다. 한국의 영어가 왜 실용적이지 않은지 이제 알겠는가?
그때 헤밍웨이의 단편을 읽거나 세익스피어를 읽고 이야기하던 교양영어는 이제 다시 대학에서 볼 수 없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