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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o May 24. 2023

친구

2019 베를린  (Contax T2)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독서실을 다녔다. 학교 앞 아파트 단지에 있던 독서실이었는데 우리 집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피가 끓어오르는 고등학교 1학년에게 거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당당하게 독서실을 가겠다고 어머니께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누구인가.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 결정권을 넘겼고 교육에 관해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고 이제는 신선의 단계에 근접하신 어머니는 내 입에서 ‘왜?’라는 외마디를 던지게 만들었다.(학창 시절 부모님은 상당히 엄격하셨다) 공부라는 원초적이고 타당한 이유로 어머니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건 17살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핑계로만 보였다.


학창 시절엔 누구나 그렇듯 친구들 무리에서 도태되는 게 싫은 나이다. 우리 집에서 배정을 받는 건 불가능하다는 고등학교로 입학한 나는 새로운 동네의 판타스틱 한 친구들을 만났다. 불과 몇 블록 떨어져 있는 동네인데 이렇게 새롭고 재미있는 녀석들이 있었다니. 역시 세상은 넓었다. 이 신선함은 고등학교 생활에 푹 빠져들게 만들었다.

친구들 무리는 10명이었는데 모두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해 추억이 가득한 녀석들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이방이었다. 이런 친구들 무리에 점차 스며들고 있었으니 방과 후 독서실에서 조우를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생각이 들었다. 매일 학교에서 만나면 전날 독서실에서 보냈던 무궁무진한 설들을 다시 들어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럽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엔 친구가 전부였고 그런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하면 더 잘할 거란 생각을 했던 거 같다.

그렇지만 학생이란 신분으로 어찌 어머니를 이길 수 있겠는가. 이 시절 어머니는 강남의 모든 교육 시스템과 학원을 꿰뚫고 다른 학부모들과 정보를 교환하는 지치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놀랍게도 난 강남 8 학군에서 초, 중고등 교육을 받았다) 또 한 가지 도움이 안 되는 사실은 전교 1, 2, 3 등을 넘나드는 성적으로 독서실의 ‘독’ 자도 모르고 집에서만 공부를 하던 누나가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결국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독서실을 포기하고 살았다. 대신 방과 후에 친구들과 1,2시간씩 시간을 보내다 귀가하는 삶으로 나름의 반항을 했다. 이것은 우리 집안에서 최초이자 상상할 수 없는 반항이었다. 그 반항은 고등학교 내내 계속됐지만 시간을 주로 보내던 방법은 친구들과 축구나 농구를 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 독서실을 다니던 친구들은 아직도 내 옆에 건재하다. 물론 같이 독서실을 안 다녀서 모르지만 그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생으로 누릴 수 있는 뻔한 재미 들로 가득 차 있다. 독서실에 만화책을 보고 pc방을 다니고 풋풋한 사랑에 빠져 시름시름거리다 나름의 고민에 지쳐 엎드려 자다 보면 시험이 코앞이던. 공부는 언제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3년이 지나고 몇몇은 대학을 다른 친구들은 재수를 하면서 또 신나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때부터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친구들과 더 많은 추억을 쌓았다.

나이와 시간에 상관없이 단단한 우정을 지키고 살아가던 친구들은 알아서 밥그릇 찾아가더니 사회에서 한몫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매일 만나는 게 자연스럽던 10대와 열정과 우정으로 살아가던 20대, 어른이라 착각하며 서로를 응원했던 30대가 지났다. 이제는 자신보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긴 가장들이다.


봄이라 느껴질 만한 날씨가 찾아오니 걷는 게 기분 좋은 하루다. 점심시간이라 거리도 음식점도 회사원 들로 가득하다. 순댓국 집을 지나다 보니 새벽에 친구들과 해장으로 먹던 순댓국과 소주가 생각난다. ‘역시 순댓국에 소주는 친구들과 새벽 3시쯤 먹어야 제맛이지’ 하면서 다른 메뉴를 찾는다. 삼겹살집을 지나는데 진한 고기 냄새가 시선을 끈다. 점심에 고기는 반칙이라고 애써 부정하지만 사회 초년 시절 친구들과 마시던 낮술이 생각난다. 메뉴를 고르다 보니 모두 점심은 챙겨 먹고 사는지 궁금해진다.

정답 없는 인생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나이지만 언제 만나도 10대 시절의 즐거움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친구들이 보고 싶다.


친구들아, 끼니는 거르지 말고 살자. 이제 밥 못 먹으면 힘없는 40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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