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1년, 세부에 갔다

코로나 종결 후, 세부에서 일주일

by 수현씨

-2031년, 겨울의 세부


코로나 시대가 종결되었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벗었으며, 해외 여행시 자가 격리 규제는 해제되었다. 다만 지속되는 환경 문제로 탄소발자국을 최소화하는 것이 세계적으로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오랜 연구 끝에 친환경 호버크래프트가 개발되었다. 그 결과 비행기로 4시간 거리였던 필리핀 세부를 단 2시간 만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갔다. 나는. 세부를.


세부의 좋은 점에 대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해가 뜨겁지만 습하지 않다. 기분 좋은 열대의 햇빛이다. 태닝 오일을 바르고 기꺼이 어깨와 팔을 햇빛에게 내맡겨 빛이 내 피부를 살라먹도록 둔다.


끈나시와 핫팬츠를 입은 사람들이 오가며 장터에서 시끄럽게 흥정하는 소리도, 라탄으로 만들어진 가방과 가구들의 모습도, 열대 과일 특유의 향도 모두 마음을 들뜨게 한다. 길거리의 과일 가게에서는 놀랍도록 싼 가격에 망고를 까서 생망고 주스를 만들어준다.


나는 세부 항구에서 배를 2시간 가량 더 타고 보홀 섬으로 들어 간다.


숙소 컨디션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라 하룻밤에 3만원 하는, 창문이 없는 방에 묵는다. 어차피 새벽에 나갔다가 밤이 되어서야 들어올 거니까.

숙박비로 3만원밖에 지불하지 않아도 토스트와 계란, 베이컨이 있는 조식을 무한 리필로 주며 룸클린 서비스도 제공한다. 그거면 됐다. 망고를 마음껏 까먹고 쓰레기통에 버려 두더라도 날벌레가 꼬이기 전에 방을 치워주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특히 내가 묵는 숙소는 싸구려라 한국인 숙박객이 없다. 더 좋다. 나는 완벽한 이방인으로 이 곳에 머물 수 있다.


보홀에 도착하자마자 해변에서 싸구려 헤나를 팔과 다리에 새긴다. 바람이 사방으로 술술 통하는 옷을 입고 목적지 없이 오래 걷는다. 정오도 되기 전에 산 미구엘 맥주를 시켜서 나시고랭과 함께 먹은 후 최은영의 소설을 오래 오래 읽는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2시간짜리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 그러곤 넷플릭스 좀 보다 잠이 드는 일정.


다음날부터는 바쁘다. 새벽에 다이빙 수트와 마스크, 오리발을 챙겨 바닷가로 나간다. 해저 절벽을 따라 마리곤돈 동굴이라 불리는 곳으로 다이빙하러 가기 위해서다. 마리곤돈 동굴 입구에는 그 동굴을 탐사하다 죽은 일본 다이버의 묘가 있는데, 17년 전에 방문했을 때는 공기통에 공기가 모자라 입구의 묘만 보고 수면으로 올라왔어야 했다. 이번엔 준비를 단단히 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동굴 안은 어둡지만 어딘가에 천정으로 뚫린 구멍이 있는지 깊은 부분에서 부드러운 빛이 새어나온다. 숨을 얕게 쉬어 공기를 아끼면서 동굴 구석 구석을 살핀다. 뼈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열대 물고기들이 바위 뒤로 바쁘게 숨는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며 물을 밀고 나아간다. 한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을 조용히 물거품을 만들면서 바다를 헤매고 다닌다.


하루 종일 다이빙을 하고 나면 녹초가 된다. 해질 무렵 또 마사지를 받고 Joe’s pizza place로 간다. 거기서 짠 피자와 맥주를 마시고 밤새 깨지 않고 달게 잠이 든다.


다음 날은 보홀 육상 투어를 간다. 육상 투어 포인트는 여러 군데이지만 난 내가 가고 싶은 곳만 간다. 오래된 자작나무 수천 그루가 서 있는 자작나무 숲과 수십 개의 언덕이 초콜릿색을 띠고 있어 초콜릿 힐이라 불리는 등반 스팟 정도만. 그리고 배를 타고 맹그로브 숲에 가서 조금 걷고, 문어 꼬치나 먹고 돌아와 또 책을 읽고 글을 조금 쓰고. 마음에 드는 마사지샵을 찾으면 마사지나 받고.


해상 투어도 하루 날을 잡아 한다. 새벽에 일어나 돌고래 와칭. 보홀 안 작은 섬으로 들어가 맛있는 네스카페를 마시고 현지 가이드와 함께 바다 수영을 한다. 점심엔 구운 파인애플과 비비큐를 한 상 차려 줘 배불리 먹는다. 해먹에서 낮잠을 잔 후 해질 녘까지 또 바다수영. 그리고 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버진아일랜드에 걸어서 다녀온다.


남은 날들은 은빛 정어리 떼어 둘러싸이러 펀다이빙도 다녀오고, 욕심 났던 다이빙 자격증을 속성으로 딴다. 보홀에서 나와 막탄 시내에서 쇼핑을 하기도 한다. 아얄라몰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선물을 잔뜩 사둔다. 진주로 만들어진 세부 특산 크림이나 엑스트라버진 코코넛 오일, 말린 망고 같은.


마지막 날 밤엔 별 다섯 개짜리, 세부 야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호텔에 묵는다. 마지막 밤이니까. 와인 한 병을 따서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조금쯤 쓴다. 그리고 깨끗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푹 자고 난 후, 눈이 돌아갈 만큼 맛있는 조식을 배 터지도록 먹는 거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할 거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와 바닷물에 얼룩덜룩하게 지워진 헤나 자국과 석회질이 많은 물 때문에 뻣뻣해진 머리카락과 함께, 남루하지만 익숙한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수천 장 찍은 바다 사진만이 꿈 같던 날들의 증거가 되어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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