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에 따르면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는 가장 높은 단계 즉, 궁극의 행복을 느끼는 단계는 자아실현(自我實現)이라고 한다. 진정한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속박, 내부의 자기검열과 같은 정신적 속박이 제거된 상태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유가 인간에게 소중한 가치이고, 알 권리와 말할 권리가 소중하다. 빈곤 문제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Sen)은 개발은 “인간이 누리는 진정한 자유를 확대하는 과정”이라며, 단순히 1인당 소득수준의 증대를 개발이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다. 나는 어려서는 원조를 받은 경험이 있고, 커서는 개발원조 현장에서 일한 까닭에 참 공감하는 말이다.
자아실현을 위한 첫 번째 기회는 교육에 대한 기회이다. 교육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사물을 이해하는 법,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교육은 사회적 계층 간에 이동을 촉진하고, 사회의 혁신과 발전에 이바지한다. 즉 교육을 통해 사람은 성장한다.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제대로 정규 학교 교육을 1년 정도밖에 받지 못했다. 집이 매우 가난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 토머스 링컨도 문맹이어서 아들 링컨이 하루속히 날품팔이를 해서라도 돈을 벌기를 원했다. 그러나 링컨은 이웃집에서 책을 빌려 셰익스피어를 읽고, 철학과 법을 공부했다. 미국의 초기 대통령인 링컨이 지역과 시대를 넘어 세기의 리더로 추앙받게 된 것은 역시 끊임없이 공부한 덕택이었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교육의 기회를 부지 부식 간에 박탈당하는 사례가 빈곤국에서 특히 많이 발견된다.
2005년 파키스탄(Pakistan)은 역사상 대규모 지진피해로 인해 한 마을이 통째로 매몰되기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나라 정부는 피해지역에 초등학교를 약 500여 개 건립해 주었다. 대규모 초등학교를 건립하자는 생각은 지진피해로 정신없던 파키스탄 당시 정부 관료의 생각인지, 오래전부터 계획에 있었지만 예산 부족으로 지연되어온 숙원 사업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새롭게 지은 학교에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는다고 했다. 먼저 그 부모들은 자녀가 학교에 가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파키스탄 농부들은 대부분 임차농이어서 수확물의 상당한 부분을 지주에게 주어야 했고, 농사철에 일손이 부족해서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농사를 배우면, 당장 일손도 덜고 고학력자로서 빈둥거리지 않고 건실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반면, 지주의 자식들은 유치원 때부터 미국 등지에 살면서 선진국의 최신 교육을 받는다. 그들이 성장해서는 고국으로 돌아와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으로 활동한다고 한다. 내가 라호르(Lahore)에서 만났던 부시장은 미국에서 언어학을 배웠다고 했다. 독특한 엑센트로 영어를 구사하는 그와 저녁을 먹으며 심경이 복잡해졌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당신네 나라, 파키스탄은 빈곤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경제를 전공하지 않았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옳은 말일지라도 상대방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고, 더구나 남을 돕겠다고 나선 사람이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직업정신에 맞지 않겠는다는 생각이 앞섰다. 언어학이 그 나라 그 시대 그 상황에 얼마나 실용적인 학습을 제공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현지의 오래된 사회적 관습으로 쌓아 올려진 사회 계층과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두꺼운 벽을 외부인의 시각에서 이들에게 환기하고 싶었다. 아니 대한민국의 개발시대에 목격한 국민통합의 에너지가 우리를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나의 경험과 아는 바를 전하고 싶었다.
파키스탄과 같은 빈곤국에서 부의 양극화와 대물림은 지속된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지위의 세습은 광범위한 사회적 불만을 낳는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은 궁핍 속에 허덕이는 기회 박탈의 피해자, 십 대와 청년들에게 탈레반(Taliban)과 같은 고소득 위험 직종을 선택하게 한다. 하루 1달러에도 못 미치는 수입을 대신하여, 한 달에 100불을 벌 수 있으니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다. 더구나 죽은 후에 알라신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사후세계를 약속한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기득권층은 미국을 악마와 제국주의라고 비판하며 불만을 호도한다.
라호르에서 알게 된 이야기말고도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딸로부터 전해 들었다. 가나 아크라(Acrra)에 있을 때 아이들은 미국대사관이 지원하는 외국인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외교관 자녀들과 가나 정치인 혹은 기업인의 자녀들이었다. 어느 날 학교 외부 행사에 참석차 버스로 이동하던 중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아이들을 가리키며, 가나 현지 출신의 학생이 말했다.
“저 아이들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야, 나와는 달라.”
“너는 저 아이와 같은 가나사람 아니야?”
“나는 저 아이들과는 클래스가 달라. 종족이 달라”
“...?”
가나에도 서로 다른 부족들이 살고 있지만, 그 학생은 혈족 상의 차이를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 멀지도 않은 미래에 이 학생이 가나를 이끌어나갈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얼마나 민의를 대표할 수 있을까?, 자신이 만나는 같은 국민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빈곤한 가정에서 자라나 학교 교육을 받은 젊은이와 부유한 가정에서 선진 외국 문물의 혜택을 입은 젊은이들은 비록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서로 간에 공감감할 수 있는 경험이나 사회적 사건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아마도 파키스탄의 라호르 부시장도 어려서부터 미국 생활에 젖어 라호르 시민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커다란 벽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한국 지도층의 자녀들 역시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어떨까?
그런데 삶의 소중한 기회를 자신의 모국 밖에서 특히, 한국에서 찾은 외국인들을 만났던 행복한 기억이 있다. 1995년 나는 마닐라(Manila) 시내 커다란 쇼핑몰이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있었다. 지프니((jeepney)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젊은 부부가 내게로 다가와 ‘한국 사람이냐?’고 반가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그들은 다짜고짜 우리나라 말로 “한국 사람, 정말 좋아요!” 하면서 자신들이 한국에서 일했던 경험, 돈을 저축해서 고향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 타국에서 따뜻한 사람의 정(情)을 느낄 수 있었던 점 등을 열거하며, 부부가 고맙다고 번갈아 가며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역시 감사하다, 한국 경험을 잘 살려 크게 성공하시라’하며 어쭙잖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처럼 아쉽게 작별인사를 했다. 버스에 오르는 젊은 부부의 뒷모습에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뿌듯함과 동질감을 느꼈다.
2001년 중국 심양(瀋陽)에서 만난 젊은 조선족 부부는 ‘한국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일하며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었고, 독립할 수 있는 제법 큰 재산을 모았다고 했다. 내가 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협의하던 연길 대학교 조선족 출신의 교수님이 소개해준 덕분이었다. ‘심양은 초행길이니 안내해줄 사람이 필요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인연이 되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저축한 돈으로 최신식 아파트를 장만했다고 했다. 경상도 자그마한 공장에서 아내는 경리 일을 보고 있었고, 지금의 남편은 나중에 공장에 합류했다고 한다. 모두 조선족 출신 젊은이들이어서 금세 친해졌고 사장님의 따뜻한 보살핌 덕택에 성실히 저축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학력도 좋지 않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없지만, 이제는 동네에 쇼핑센터를 낼 수 있는 정도의 저축을 했다고 매우 감사해했다.
나의 다음 목적지가 상해(上海)라는 점을 알고 그들 부부는 상하이에 있는 사촌 동생을 소개해주었다. 국제도시인 상하이는 내게도 충격일 정도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초행길이었던 중국을 짧은 시간에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외국인과 내국인에게 각각 다른 가격 즉, 이중가격제를 시행하였다. 2년 뒤 2003년 내가 북경으로 파견될 수 있었던 것도 이를 계기로 중국어를 계속 학습한 것이 원인(遠因)이 되었으리라.
내가 만난 젊은 부부들은 한결같이 한국에 감사해했다. 고향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취업과 창업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자신들을 한 가족으로 따뜻하게 감싸 안아준 대한민국을 자신의 고국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기회를 얻지 못했던 그들은 ‘대한민국과 함께 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을 기회가 박탈당한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돌아간 고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정말 감사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