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사적 배경지식에 대한 무지를 깨달으며, 인생에서 인문학 공부는 필수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듣고 있는 강의는 <현대미술을 보는 철학의 눈>이다.
역사, 철학 그리고 미술사는 거의 일맥 상통한다. '역사를 알아야, 철학이 이해가 되고, 철학을 이해해야 미술사가 읽힌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알고는 있었지만, 그러한 학습을 실천에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역사적 지식을 조금 높일 수 있는 발걸음이 되어 기쁘다.
팝아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적 상황과 철학에 대한 사고의 뒷받침은 꼭 필요한 요소이다.
팝아트는 지난주 강의-마셀 뒤샹의 Reday-Made 다음으로 전개되는 현대 미술의 흐름이며, 그 Reday-Made의 기본 정신은 Dadaism으로 파생되었고 그 기조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있었다.
팝아트는 1950년대 후반, 즉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 후 쯔음,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영국은 전쟁 후 크나큰 후유증을 앓고 있었고, 반면 미국은 전쟁을 통해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 중 개발된 수많은 대량생산 물품들이 영국으로 유입되고, 이에 작가들은 광고와 미디어를 통해 대량생산 용품들이 일상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안에 예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대중적인 미술 시대가 나름 팝아트의 선구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청계천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을 제작한 올덴버그와 몇 년 전 대기업 비자금 문제로 인해 유명해진 작품의 작가 리히텐슈타인은 앤디워홀과 함께 팝아트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200 Soup cans>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반복적으로 매일 똑같아 보이는 이 일상에도 어느 정도의 차이가 지속적으로 쌓여간다. 만약 반복되는 일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권태'만 보이고, 반복되는 일상 속의 작은 차이들이 생성이라는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면 '열정'이 보인다고 했다. 위의 <200개의 캠밸 수프 깡통>의 작업은 어찌 보면 똑같은 깡통을 반복적으로 그려놓은 우리의 일상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깡통의 하나하나를 관찰하면, 똑같은 라벨이 반복되지만 그 안의 한 가지 요소는 200개 모두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매일 똑같고 지루한 일상 같지만 조금씩 다른 차이가 있는 삶의 근본적인 원리이자 일상의 핵심적 개념을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조광제 교수의 <200 Soup Cans>, 앤디 워홀의 작업에 대한 해석은 아래와 같다.
첫째, 반복 자체가 구멍을 뚫는 작업이고, 그렇게 구멍을 뚫어나가는 데에 작용하는 것은 미세한 차이들이다.
둘째,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워홀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셋째, 반복에 의한 구멍은 존재하는 것들, 특히 현존하는 대량 사회의 맨 밑바탕으로 내려가는 통로이다
넷째, 반복에 의한 구멍을 드나드는 자가 바로 워홀이고, 그런 점에서 워홀은 대량 사회의 무당으로 보아야 한다.
이 독법은 '샤머니즘적 독법'(shamanist reading)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해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내용이 덫붙여져야 한다.
Platon의 idea (이데아)는
1. 가장 좋은 것
2. 불변
3. 모범(=이상)
4. 본질
5. 반복
이라 정의된다.
반복이라는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2014, 2015, 2016..., 아침, 점심, 저녁 등의 반복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존재이고 본질이며 자연 전체, 즉 존재 자체가 차이와 반복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삶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1990년의 가장 유명한 철학가 Gille Delege(1925~1995)는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어떤 경우든 반복은 개념(=본질=idea) 없는 차이다."라고 말했다.
[앤디 워홀의 철학]에서 "나는 결코 산산조각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본질적으로(essentially) 똑같은 것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곧이곧대로(exactly) 똑같은 것이기를 원한다. 왜냐고?
당신이 곧이곧대로 똑같은 것을 더 많이 쳐다보면 볼수록, 의미는 더욱더 사라져 없어지고, 당신은 더욱더 텅 빈 상태가 되어 더욱더 좋은 기분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앤디 워홀의 생각들은 동양의 "선=Zen"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했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
강의 마지막으로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든 워홀의 기념비적 작품과 조광제 교수의 해석으로 난해한 앤디워홀과 팝아트에 관한 공부를 정리해 본다.
<브릴로 상자>,1964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지우면서 다시 긋습니다. 점선의 경계선 인 셈입니다. 점선이라고 해서 무조건 넘나들 수는 없습니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잘 살피면서 왔다 갔다 건너야 합니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뿐만 아니라 삶 전체, 존재 전체가 그러합니다.
날카로운 작두를 아슬아슬하게 타면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당처럼, 워홀은 과잉의 기계적 반복으로 넘쳐나는 광기의 대량 문화 사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저 심층에서부터 예술을 길어 올리고 있습니다.
음,
반복해서 책을 읽는 수밖에... 그렇게 조금씩 깊어지겠지... 인생도 마찬가지이겠지....
다시 한번 글을 정리하며 오래전에 들었던 앤디워홀과 팝아트에 관한 미술사적 의미를 되돌아보았다. 최근 나는 최진석 교수의 철학 강의를 듣곤 하는데, 얇은 종이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사람들을 자주 언급하곤 하신다. 그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앤디워홀을 바라본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상이라는 의미와 반복 그리고 차이 그 후의 무한 반복으로 만들어지는 뚫어내는 구멍, 이 모든 것들이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시사점을 선사해 주는지 다시금 생각에 머문다.
최근 월드컵을 보면서 축구선수들의 열정을 바라보곤 한다. 내 아들도 현재 축구선수의 꿈을 가지고 매일같이 훈련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라고 느끼지 않고, 어떻게 내 삶에 내 아들 삶 속에 반복과 차이를 통한 뚫어냄을 가져갈지 매일매일 고민이 되기도 한다.
많은 자기 계발에서도 말한다. 작은 한발, 작은 차이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다가 어느 날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원했던 삶을 찾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