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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약사 Jan 08. 2023

비대면 진료 후, 약 배달 왔어요!




코로나 비대면 진료 시절 이야기이다. 

진료가 끝나면 병원 간호사 선생님이 

처방전에 환자의 전화번호를 적어서 가져다주신다. 

그러면 약국에서 조제 후 

환자에게 연락해서 택배로 보내거나, 

환자의 지인이 대신 받아 가면 된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들은 

집에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루어졌던 서비스다.




“약사님, 이 사람 좀 이상해. 막 욕하고 난리 났어. 

약사님이 전화하지 말고, 

이따가 국장님 오시면 하라 그래. 상대하지 마.”


평소 나를 좋게 봐주셨던 간호사 선생님이 

내가 곤욕스러움을 겪지 않도록 위하고자 해 주시는 말이다. 

간호사 선생님은 이미 불쾌감으로 몸서리치고 계셨다. 

예민한 이분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을 그 사람. 


WPI를 배운 나로서는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전화기 너머의 인물이 낭만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고, 

규범 수준이 높은 행동 양식을 보이는 사람일 거라고 

예상을 해볼 수 있었다.




감각이 날카롭고, 예민한 사람. 

주변에 영향을 쉽게 받는 섬세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한 감정 기복이 크다. 

또 그런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렇게 몽글하기도 하고, 

때론 매섭기도 한 드라마틱한 감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일까? 

이상적으로 여기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기도 하고, 

학습해 온 사회적 믿음들을 

타인에게 강요하기도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자신이 존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며 

과도한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언론에서 접하는 

조현병 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사람들일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했을 때, 

억압적이고 긴장된 환경에 오래 머무르게 되었을 때, 

아무도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을 때, 

마음이 여린 그들은 

더더욱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환상 속으로 도망친다.


다른 사람들은 들리지 않는 소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이 눈앞의 어떤 형체로 인식되기도 한다. 


잔뜩 날카로워진 감각으로 사소한 것에서 단서를 잡아,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 해석을 하기도 한다. 

환청, 환시, 망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조현병의 이전 이름은 정신분열증이다. 

스키조프레니아의 어원은 마음이 나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신이 분열됐다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그에 비해 조현병이라는 병명은 

악기 줄을 열심히 조율해 보라는 것 같은데,

문제 상황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나름의 답안을 이름에 붙인 꼴이다. 


아마도 이렇게 이름을 짓는다면, 

각종 성인병은 운동해-병, 

감염병은 평소에 잘 씻어-병, 

이런 식의 이름을 붙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프다는 증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고, 

탐구를 제한하며 

훈계하는 듯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마음이 나뉘었다는 표현을 하게 되었을까. 


한 사람에게서 도저히 동일 인물이라 볼 수 없는, 

낯선 이의 모습이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그 사람이 추상적이고 복잡한 자극을, 

이분법과 같은 단순한 기준으로 나누고, 

감정을 극적으로 증폭시키는 것을 보고 

그런 표현을 하게 됐을까.




나는 정신분열증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다중인격을 가지는 병인 줄 알았다. 

그래서 아이의 인격도 따로 있고, 

살인자의 인격도 따로 있고, 

여러 명의 부캐를 갖는 병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약물학 교과서에서 

우울증의 다음 악화 단계로 

정신분열증이 정리된 표를 보고 무척 신기해했었다. 


긴장을 풀기 위한 진정제가 과해지면 수면제가 되고, 

수면제가 과해지면 마취제가 된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은 

도저히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완전히 별개의 병처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울증은 우울증에 걸리는 기전이 따로 있고, 

정신분열증은 정신분열증에 걸리는 기전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우울증에는 우울증 약을 먹고, 

정신분열증에는 정신분열증 약을 먹는 것인 줄 알았다. 

(물론 더 기대하는 효과를 잘 보이는 약물은 있을 것이다.)




마음에 대해 배우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믿음들이 만들어 낸 

다양한 성향들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병이나 증상이라 불리는 것은, 

그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마음의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특정 순간을 고정해 놓았을 뿐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따라 

순차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만한 행동에 대해, 

단순하게 비정상으로 낙인이 붙는다. 


얼마든지 안정적인 궤도로 돌아올 수 있음에도, 

진단명과 입원 기록으로 

그 기회를 잃고 고착될 위험이 생기는 것이다. 




어쨌든 내 손에는 그렇게 

전화번호가 적인 처방전이 한 장 옮겨졌다. 


나는 도전해 보기로 했다. 

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보리라!


로맨-매뉴얼 분들의 마음을 상상하며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 사람이 무시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람이 화가 난 것은 

아주 세심하게 살펴야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사람의 마음은 

엄청난 자책과 두려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침착하고 꿋꿋한 태도로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OO 약국인데요. 

코로나 비대면 진료받으셨죠?”


“아니, 사람들이 말이야!”


아직 화가 나 있다. 


침착하게 이 사람이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진지하게 묻고 귀담아들어야 한다.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이다.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말투, 억양, 어휘, 분위기, 음색 하나하나 

빠짐없이 날카롭게 지적해 올 것이다.


나는 나를 격려하는 한편, 

내심 자신이 있기도 했다. 

상담 사례들을 공부하면서, 

이 사람들이 얼마나 착하게 살고자 노력하며 지내고, 

겁을 먹고 있는지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화가 날 만도 하네요.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말투는 상냥하게 해 줄 수는 있는 건데…”




이분의 사정은 그랬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나서 

불안하고 걱정이 많았던 와중에, 

처방 약을 대리 수령해 줄 마땅한 지인이 없는 것이다. 


일단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과 교제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자신의 정서적이고 이상적인 기준을 

타인도 지켜주길 기대하다 보니, 

대인관계에 어려움도 많다. 

또한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부탁하기도 몹시 어려워한다.


그렇다고 직접 집 밖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엄청난 걱정을 하고 계시는 중이셨다. 

자신이 약국까지 가는 동안 

누군가가 112나 보건소에 신고할 것이라며 

두려워하고 계셨다. 


그 불안을 해결할 길이 없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종합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누군가 신고할 가능성이 있냐고 물어보신 모양이었다. 

아마도 이전에 인연이 있거나 

마음으로 의지하는 병원일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안내 전화를 받는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을 터. 

그래서 아마 모르겠다고 

알아서 하시라는 답을 하셨나 보다. 

아마 나도 그런 상황에서는 

뭐라고 답을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당연히 이분의 불안이 달래지거나, 

해법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퉁명스러운 불쾌감이 증폭 됐을 뿐이다. 

그렇게 계속 전화를 붙들고 실랑이하셨나 보다. 

상대방의 인내심은 이내 바닥이 났고, 

이분은 마음이 많이 상했다.


아마도 이대로 약을 받지 못해서 

더 증상이 악화되면 어떡하나 걱정도 하셨을 것 같다. 

약을 받아 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이쪽에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셨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걱정들 속에서 

진료받은 병원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또다시 좋은 반응을 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통화를 하게 되기까지 

이분이 겪으셨던 일들이다. 


찬찬히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들어드리자 

많이 편안해지신 듯 

이야기 속도도 느긋해졌다.




“제가 있다가 2시간 뒤면 퇴근하니까, 

갖다 드릴게요. 댁이 어디세요?”


“네? 아 그러면 제가 너무 죄송한데




나는 약 배달이 재밌다. 

코로나 격리 문제가 아니더라도, 

종종 약을 배달할 일이 있다. 


사실 조금 덤벙대는 편이라 

처방전의 약들을 깜박 잊고 못 드리거나 

잘못 드리는 까닭이다. 


약국으로 다시 나와달라고 부탁드려도 되지만, 

직접 집과 근무처를 찾아가 보게 되면 느끼는 게 많다.


식사를 이렇게 한쪽에서 급하게 하셔야 해서 

계속 위장약을 드시는 거였구나. 

주변에 편의점이 이렇게 많아서 

자정까지 슈퍼를 운영하셔야 했겠구나. 

매일 이 정도 거리를 출퇴근하시는구나. 

이렇게 종일 서서 일하셔서 

다리가 계속 부어 있으셨던 거구나. 등등. 


처방전 너머의 삶이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혹시 일은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자기의 에너지를 어디에 쏟고 계시는지, 

하루하루 생활이 어떻게 되는지 여쭤볼 요량이었다.


“저는 일을 하면 안 돼요.”

“왜요?”

“취직하면, 지금 받는 급여를 받을 수가 없어요.”


난감하다. 

이제 서른이 갓 지났는데, 

아직 좀 더 자신을 성장시켜도 좋은 나이인데…라는 

아쉬움이 올라왔다. 


그렇다고 이분의 마음 상황이 

낯선 곳에서 사람들과 마찰 없이 

오래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이렇게 머물게 되는 것이 더 다행일까. 


한때 기본소득 배당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었다. 

인간은 생계가 보장되면 

창조 활동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는 

논리도 뒷받침되었었다. 


나도 당시에는 

그런 미래를 이상적으로 꿈꾸었으나, 

정말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될까? 

갑자기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사실 이렇게 글을 적고 있는 

나의 경우엔, 적어도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들고, 

글을 적고, 

연주하고. 


그런 활동을 동경하면서도 

그것을 꼭 해야 한다는 

나름의 확신을 갖기 전에는 

선뜻 나아가기가 쉽지 않게 느껴진다.




직접 찾아가서 본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감각적인 사람이었다. 

성말라 보이는 호리호리한 체구에 세련된 헤어스타일. 

집에서 입고 있는 차림이라도 패션 센스가 느껴졌다.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조심스레 건네받는 손은, 

키보드 건반을 만지거나 

기타를 연주하면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은 상상이 저절로 들었다.


이런 모습으로 전화기를 붙들고, 

이 병원 저 병원 전화를 걸며 

화를 내고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며, 

불안해하고 긴장한 모습으로. 

아무도 자신의 마음에 공감해주지 않는 것에 

초조해하고 답답해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나의 SNS에 그가 접속한 흔적이 보였다. 

아마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었나 보다. 


내가 건네주고 온 것이 단순히 약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신뢰할 수 있는 하나의 조각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한 사람에게 한두 사람이 

진득하게 전력을 쏟기는 경험상 쉽지 않았다. 

지난하고 괴롭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가 한 조각씩 보태면 

'광산의 카나리아'를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나 역시 누군가의 도움 조각들로 

힘을 얻어서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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