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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Nov 26. 2020

오늘이 행복한 아이와 살고 싶다

아이를 처음으로 품에 안고 찍은 사진을 본다. 


십년 전 그때, 비록 얼굴은 권투선수처럼 여기저기 부어오르고 입술도 고통을 참느라 깨물어서 피딱지가 앉고 퉁퉁 부어있었고, 마치 권투선수 록키가 링에서 내려와 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은것 같던 그 사진.


나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찬찬히 오밀조밀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안녕 반가워, 아가야. 내가 엄마야. 우리 서로 많이 웃고 행복하게 잘 살자’라고 마음속으로 첫인사를 건넸었다.      

엄마로 변신한 그 순간, 나는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서 찬찬히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살다 가는 것일까? 내가 아이를 돌보는 시간 동안 아이는 내 품에서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다가 자신의 멋진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해줘야 할는지 순간 막막한 심정도 들었다.      


내가 만약 지금도 혼자 살고 있다면 굳이 그렇게 진지하게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행을 가고 싶은데 떠날 수 있다면 행복했을 것이고, 돈이 필요할 때 지갑이 두둑하다면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며 나는 그저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여행도 시들해지고 그렇게 원하던 것들도 서서히 낡거나 지겨워지고 나는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는 일을 찾아 헤맬 것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주는 것이 행복하게 해주는 것일까? 우리는 보통 행복할 때 깔깔거리며 함박웃음을 짓지 않나? 어렸을 땐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신나게 잘 놀아주고, 술래잡기나 숨바꼭질 같은 걸 하면 술래가 잡으러 올 때 잡히지 않으려고 마구 뛰어가면서 느껴지는 스릴이 좋은지 아이는 소리를 지르면서 깔깔 웃으며 뛰어다녔다. 어린이집을 다닐 땐 그냥 하루하루 신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놀았다. 아무것도 없는 흙 마당에서도 아이는 온종일이라도 뭔가를 하며 바쁘게 왔다 갔다 했다. 때론 친구들과 뜻이 맞아 놀이로 진행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혼자서 열심히 그저 땅을 파고 나뭇잎을 묻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을 먹고 나면 아이는 초저녁부터 뻗어 잠이 들어버린다. 아무래도 온종일 땅을 파고 물길을 내고 했던 것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곤히 잠든 얼굴을 남편과 가만히 들여다보며 ‘지금 이 아이는 행복할까? 덕분에 지켜보는 우리도 행복한 걸 보면 아마 행복할 거야’라며 어깨를 으쓱거렸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공부라는 것을 의무적으로 규칙적으로 시작하게 되면서 아이는 애초부터 공부라는 것에는 큰 흥미가 없는 듯 보인다. 수학책에서 예를 들어 「8+4를 구하시오」 라는 문제를 보면 “이걸 지금 나에게 구하라는 거야? 왜 내가 그걸 구해야 해? 난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데..”

아이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문제들을 잔뜩 주고 답을 찾아내라고 옆에서 득달하는 엄마가 이상하게 보이나 보다. 지금은 별로 안 궁금해도 살다 보면 이런 게 중요하다며 그냥 풀어보라고 여전히 다그치고 있다. 놀이터 가서 놀고 싶고 인형 놀이도 해야 하는데 뭘 자꾸 더해보고 빼보라고 하는지…. 여전히 석연찮은 눈빛이다. 


어린이집 생활을 할 때는 하루하루 재미있는 일과를 보내고 내일은 또 어떤 재미있는 일을 할까 하고 고민하던 녀석인데 며칠 상관으로 의자에 딱 앉혀놓고 덧셈과 뺄셈을 하라고 하니 녀석도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뭘 그리들 많이 배워야 하는지 집에 피아노도 없고 음악에 별 관심도 없는데 피아노학원은 기본으로 가야 한다고 하고, 미술과 태권도도 저학년때 배워놓아야 한다고들 하고 벌써 영어학원에 다닌다는 아이도 있다니 천지도 모르는 엄마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마치 40여 년 전에 사는 사람을 타임 슬랩으로 현재로 강제 소환시킨 것 마냥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는지 앞이 캄캄했다. 내가 만약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는 도저히 못 따라갈 것 같았다. 겨우겨우 학교를 마치고 나왔는데 바로 학원 버스를 타고 또다시 학원으로 가라고 하면 정말 화가 나고 짜증이 날 것 같은데 아이들은 또 아무 말 없이 각자의 휴대전화를 쳐다보며 게임 같을 것을 하면서 각자 버스로 올라타는 모습을 보면 요즘 아이들이 참 순하고 착하다는 감탄마저 들 정도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살면서 알아야 할 기초적인 것들을 배우기 시작한다. 덧셈과 뺄셈을 하고 한글도 배운다. 내겐 그런 것들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배워야 할 기초덕목이라고 생각되는데, 예를 들어 줄을 설 때 새치기를 하면 안 된다는 것 같은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이런 기초 덕목 같은 것들도 우열을 가리고 싶어 한다. 학원을 가서 좀 더 세밀한 부분부터 심화 과정까지 배워서 차별화를 이루는 사실에 나도 의례 어릴 적 거쳐왔던 것이기도 하지만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어서 되돌아보니 씁쓸하기만 하다.      

아직은 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인 엄마 얼굴을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에게 “그래, 엄마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그런데 그날은 오늘은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좀 많이 기다린 어느 날이 될 거야”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이 행복하다는 말, 우리는 흔히 아는 배짱이 같은 삶보다는 열심히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개미 같은 삶이 더욱 가치 있다고 배우고 살았다. 그러나 오늘의 행복이 유희나 탐욕 같은 것이 아닌 그저 소박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것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그런 행복을 오늘도 내일도 원한다는 게 그리 잘못된 인생관은 아니지 않을까.     


오늘이 행복하고 내일이 행복하고 그런 하루하루가 마치 신문처럼 쌓이고 쌓여 긴 세월을 엮어 스크랩으로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마치 누군가가 어딘가에 깃발을 꽂고 “진격, 앞으로!”를 외치며 옆은 돌아보지 말라고 앞만 보고 달리라고 한다면 나는 내 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깃발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렇게 열심히 뛰지도 말고 옆도 돌아보고 가다가 샛길로도 빠져 여러 재미있는 일들을 구경하면서 조금만 가도 된다. 어차피 그건 네가 꽂은 깃발이 아니었으며 그곳에 가고 싶지 않으면 안가도 된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을 찾아 너만의 깃발을 꽂고, 달리고 싶으면 달리고 쉬고 싶으면 쉬었다 가는 완급 조절도 하고 돌아가는 샛길도 있고 막다른 골목길도 있지만 네가 만든 너의 지도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다 네 것이기에 너는 온종일 행복할 수 있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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