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다. 엄마의 말을 배워서 뜻도 모르는 “연년생이에요.”라는 대답이 내 입에 붙어있었다. 정확히는 1년 6개월이 차이다. 왜소하고 작은 나와 달리 동생은 통통하고 건실하다. 보는 사람이 열이면 열 “얘가 오빠로구나.” 했다.
이 튼실한 아이는 4살 때부터 무술 도장에 다닌다. 처음에는 집 건너편에 있는 합기도장, 그다음은 국술원, 그다음은 태권도장. 흰 띠부터 시작해서 차곡차곡 색깔에 물든 띠들로 허리끈을 바꾸어 갔다.
동생이 나보다 크건, 나보다 힘이 세건, 나보다 싸움을 잘하건 엄마 눈에는 어린아이였다. 나는 누나 된 자로서 동생을 보살필 의무가 있다. 동생은 애기니까 말이다. 도장까지 동생을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 오는 일을 했다. 합기도장은 집에서 1~2 분이면 가기 때문에 일도 아니었지만 태권도장에 데려가는 것은 너무 귀찮았다. 멀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내가 갈 수밖에 없었다. 다섯 살을 인솔하는 여섯 살이라니…… 어느 날은 집에 가는 길에 합기도장 사범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왜 부모님도 없이 너희 둘만 돌아다니고 있냐'라고 놀라셨다. 누가 봐도 나는 동생의 보호자처럼은 보이지 않았나 보다.
억울한 기억만 있을 것 같지만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우리는 탐험하는 기분을 가지고 있었다. 태권도장으로 가는 길은 시장을 지나가야 했다. 길가에는 눈을 사로잡는 노점상이 많았다. 우리 동네에선 ‘톡톡’이라 불렀던 달고나, 동물 모양의 거대 사탕이 있는 뽑기, ‘퐁퐁’이라 불렀던 트램펄린. 엄마가 신신당부하였기 때문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지만 눈이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유혹에 넘어간 날이 있다. 퐁퐁 할아버지가 50원에 두 사람이 타도된다는 말을 했을 때다. 매번 유혹에 빠질 것 같은 순간에 다른 한 사람이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누나로서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 이번 한 번뿐이야.” 동생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피었다. 나도 웃었다. 초록색 그물 위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고 하늘이 손에 잡힐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잠깐 한눈을 판 탓에 도장에는 늦고 말았다. 둘 다 변명거리를 생각해 두지 않아서 어물어물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약간 혼이 나기는 했지만 둘만의 비밀 일탈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날의 퐁퐁은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퐁퐁으로 기억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