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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캉쓰 Mar 03. 2022

전지적 돌쟁이 시점

내 돌잔치의 추억

견딜 만큼 견뎠다. 분주한 사람들을 하루 종일 바라보기도 지친다.







넓다고 해야 할지, 좁다고 해야 할지 모를 방 안에는 파티 준비가 한창이다. 아니, 파티보다는 잔치가 더 어울리겠다. 상 위에는 윗부분을 잘라 속살을 드러낸 수박이며 사과, 겹겹이 쌓아 올린 색색의 떡이 가득하다. 전형적인 잔칫상이다. 나를 아랑곳 않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은 나의 엄마와 친척, 그리고 이웃의 아주머니들이다.







그렇게 지겹다면서 ‘너는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아, 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이 잔치의 주인공은 나다. 오해하지 마시길. 주인공이니까 손 하나 까닥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오만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덧붙이자면 이건 나의 첫 번째 생일이다. 첫 생일을 다른 말로 뭐라고 하던데……? 아, 생각났다. 오늘은 나의 돌잔치인 것이다. 돌쟁이인 나는 아직 걸음마도 잘 못해서 일손을 건들기는커녕 얌전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들다.



 



잠깐,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글은 소설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다. 한 살 아기가 화자로 나와 떠들어 댄다고 이상하게 여길 것 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한 살 시절이 있지 않은가. 당신이 간혹 고등학교 때 들었던 음악, 중학교 때 봤던 만화, 초등학교 때 했던 놀이를 생각하며 과거로 회귀하듯이 나 역시 잠시 한 살 시점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한 살의 기억이 전생과 같이 아득한 기억이라는 것을 안다. 최초의 기억을 물으면 5살, 좀 더 기억하는 사람은 3살 즈음을 말한다. 그들에게 돌잔치의 기억은 초능력자쯤 되어야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단순히 기억력이 좋을 뿐이다.   



 



돌잔치 당일인 오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울면 안 돼.”



좋은 날이란 뭘까? 좋은 날과 울면 안 되는 건 무슨 관계일까? 어리둥절하는 나를 두고 엄마는 본격적으로 일에 나섰다. 손을 보탠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누구보다 성실히 일해야 할 터다. 음식을 준비하고 나르느라 주방과 방을 왔다 갔다 한다. 엄마가 보였다 사라지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데 나한테는 관심도 갖지 않는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이상한 흰색 털옷을 입고 있느라 마음이 영 좋지 못한데 말이다. 그나마 손에 금반지를 세 개 끼워 주어서 반짝임을 보느라 정신을 팔았다. 한 이모가 “어린것이 금 좋은 건 알아 가지고” 하고 말한 것이 조금 신경 쓰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손짓을 해도 봐 주지도 않고! 이제 나는, 여기서, 당당히 울음을 터트리려고 한다.



“흐, 흐윽, 우에앵……. 우……”



그때 한 이모가 외쳤다.



“쟤 운다!!!”



울음에 시동을 걸고 있는데 들키고 말았다. 엄마는 황급히 뛰어와 팔을 치켜올리며 “울지 말라고 했지!” 하고 다그쳤다. 다급하고 잔뜩 찌푸린 얼굴을 보니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다. 미안함과 섭섭함, 억울함 그런 감정들이었겠지만 아기는 그렇게 세분화해서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저 서럽게 울 뿐이다. 결국 울음바다가 되고 엄마는 나를 안아 들고 달래주어야만 했다.



 



스무 살이 넘은 언젠가 그날 일이 너무 서운했다고 엄마에게 토로한 적이 있다. 너무 당연하게도 엄마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 큰 딸이 갓난아기 때의 일을 들추니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물론 영혼은 없었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어떤 경험은 오래도록 간직하면서 어떤 경험은 금세 잊어버린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나의 경우 기억하고 있는 것의 태반이 엄마에게 섭섭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기억이 머리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감정이 많은 것을 좌우한다. 기억으로 남느냐 망각으로 가느냐는 경험에 대한 감각과 감정이 결정한다. 돌잔치의 추억도 그날의 감각과 감정이 남긴 선물이다. 부모는 아이의 우주라고 하지 않던가. 사소한 표정과 말이 깊게 남을 정도로 나는 엄마의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살피고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는 친구들이 애 엄마가 되었다. 육아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어릴 때 엄마가 이래서 좋았지, 싫었지, 섭섭했지 등등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그네들 얼굴이 어두워지곤 한다. 혹시 모른다. 그 아이들도 스무 살 넘어서 그땐 왜 그랬냐고 뒤늦게 따지고 들지도. 아이가 없는 나는 그냥 깔깔 웃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부모들이여, 너무 걱정은 하지 말기를. 그 또한 열렬히 사랑받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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