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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Jan 11. 2022

시문학으로 읽는 식민지 인문학 4

#김억 #민요

1. 민요의 ‘발견’과 조작된 ‘한(恨)의 민족’     


    ‘민중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나서 전해지는 노래’라는 뜻을 가진 ‘민요(民謠)’라는 말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노래는 존재했으나, 그것들을 ‘민요’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창조> 창간호(1919. 2)에서 주요한은 「일본근대시초 1」라는 글에서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을 ‘민요의 완성자’라고 표현하였다. 그에게 있어 ‘민요’는 전승된 민간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당대의 일본시를 지칭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상준의 잡가집 <조선신구잡가(朝鮮新舊雜歌)>(1921, 박문서관)가 발간되면서 ‘민요’라는 어휘가 본격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그러한 성질의 노래를 ‘잡가(雜歌)’라 불렀는데, 조선말 가사와 시조, 판소리 등의 성악이 번창하면서 서민문화의 활성화로 등장한 노래패들의 노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잡가’는 근대 초기 박멸이나 개량의 대상이었다. 일제의 국권 침탈 따른 국가-부재 상황에서 자주독립과 근대국가 건설을 초미의 과제로 안고 있었던 식민지 상황에서 잡가는 그와 같은 사명에 부합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식민지 지식인들은 민요와 통속민요를 음담패설(淫談悖說)이나 음풍왜음(淫風哇音) 등의 노래로 비판하면서 ‘가곡개량운동’을 주도하였다. 민요와 통속민요가 일반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개량하여 계몽 이념을 전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식민 지배 초기 일본 주도 하에 전개된 관학(官學)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자료들을 수집하고 집대성하면서 ‘민요’ 역시 조선의 문화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민요와 속담 등을 수집하여 조선의 인정과 사회상을 조사하는 일은 물론 조선인의 성정을 정의하려 했다. 물론 일본의 의도는 분명했다. 일본과 조선의 문화가 동일한 것이라는 ‘내선일체론’과 나약하고 게으른 조선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을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후일 경성제국대학 교수 겸 조선총독부의 시학관(視學官)을 역임했던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는 조선인을 불우한 운명에 대한 순종, 그러한 운명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낙천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민족으로 규정한 것처럼, 조선인의 대표적인 성정이라 여겨지는 ‘(여성적) 한(恨)’이라는 정서는 원래 우리가 가진 정서가 아니라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이마무라 토모에(今村鞆)는 민요 <아리랑>을 예로 들어 ‘체념과 찰나의 향락주의’를 조선의 민족성으로 규정하였고, 시미즈 헤이조(淸水兵三)는 조선을 ‘괴로운 사랑, 슬픈 사랑의 나라’로 정의하기도 했다. 즉 일제는 조선을 섬약한 여성의 이미지로 환원시키면서 서구와 맞설 ‘동양 전체’를 주도하는 강력한 남성성을 가진 일본에게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을 작동시킨 것이다.


일제는 우리 민요 <아리랑>을 식민담론으로 해석해냈다. 피식민지의 설움이다.


     

2. “울밑에선 봉숭아야 내모습이 처량하다”


民謠는 그 國民性의 表現된 꼿이라 함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외다. 딸하 民謠의 價値가 어떠하다 함은 이제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업겟습니다. 다못 恨스러운 것은 우리 民族의 노래는 넘우나 荒野에 버리워진 것 가튼 그것이외다. 이것은 濟州島의 主張女子들이 부르는 노래올시다. 노골적 단조로운 「리리크」로써 참으로 우리 民族이 人情에 줄이고 사랑의 憧憬에 心情의 泉이 넘처나는 설음이올시다. 赤裸裸인 粗野의 人間의 神聖한 美의 赤子입니다.
世界人類로 朝鮮사람으로 우리 江山에 우리의 말로써 살 우리 民族의 將來에 올 새 詩人은 먼저 우리의 民謠 童謠에 튼튼히 握手하여야만 할 것을 말해둔다.
―강봉옥, 「제주도의 민요 오십수, 맷돌 가는 여자들의 주고 받는 노래」, <개벽> 32호, 1923. 2.


    강봉옥은 민요가 ‘국민성이 표현된 꽃’이라고 지적하면서 고대에서부터 구전되는 노래를 ‘민족’이라는 관념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는 민요가 우리 민족의 정감에 의한 ‘설움’이자 인간 신성한 미의 ‘적자’이므로, 우리 민족의 노래가 더 이상 전승되거나 관심 밖에 처한 것을 황야에 버려진 것이라고 빗대며 한스럽다고 토로하였다. 홍종인 역시 우리 민족의 장래에 올 ‘새 시인’은 민요와 튼튼히 악수해야할 것임을 지적하며, 민요의 중요성을 주지시키면서 채록한 민요를 소개하였다.

    특히 잡지 <개벽>은 1920년대 초부터 민요의 채록과 함께 민요 소개를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당시 민요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민요를 ‘설움과 한의 노래’로 규정하거나, 다른 하나는 민족성을 담지한 노래로 보는 것이다. 전자는 일본의 관학파의 규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고, 후자는 일본의 국민문학론의 영향을 받아 조선 역시 그와 같은 민족 고유의 노래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 고유의 문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식민지 지식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라는 것이다. 비록 방법론은 일본으로부터 모방한 것이지만,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1920년대에 민요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아리랑>과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같이 민중들의 정서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신민요와 잡가의 영역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서양음악의 도입으로 인해 유행가와 가곡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잡가의 유행으로 여러 지역의 음악적 특성을 가미한 새로운 곡이 무대용 음악이나 유성기 음반의 소재로 자주 이용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잡가가 1910년대에 집중적으로 잡가집(남도잡가, 서도잡가)에 등장하는데, 곧 유성기 음반으로 제작되면서 후에 신민요가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민요와 유행가 사이의 과도기적 성격을 가지고 신민요는 1930년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는데, 일본식이나 서양식의 악곡에 맞춰 기존 민요를 편곡한 것이었다. 뒤이어 유행가도 등장하면서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이 혼재되는 양상에서 차츰 서양음악 중심으로 재편하게 된다.

     또한 1920년대 들어서 ‘가곡’이라는 장르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 가곡으로 알려진 홍난파 작곡, 김형준 작사의 <봉선화>가 레코드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널리 전파되었다. 후에 성악가 김천애가 도쿄 히비야 공화당에서 개최한 <전일본 신인음악회>에 하얀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출연하여 <봉선화>를 부르면서 <봉선화>는 일본에 의해 금지곡이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홍난파와 김천애. 이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가곡이 만들어졌다.


울밑에선 봉숭아야 내모습이 처량하다

길고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아름다운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내모양이 처량하다

― <봉선화> 전문

    

    찬바람에 낙화로 사라질지라도 ‘아름다운 꽃송이’는 기억에 남듯, 도래할 새봄에 다시 소생할 것을 소망하는 봉선화를 향한 마음은 나라를 잃은 망국의 슬픔을 환기시킨다. ‘민족의 노래’로 승화된 <봉선화>는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고, 본격적으로 가곡이 창작되고 발표되기 시작한다. <봄처녀>, <성불사의 봄>(이은상 시, 홍난파 곡), <가고파>(이은상 시, 김동진 곡), <선구자>(윤해영 시, 조두남 곡) 등의 작품들이 창작되면서 예술가곡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일본어 가사로 된 창가만 부르도록 강제되는 식민지 상황에서 가곡이나 민요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에서 더욱 유행했던 것이다.     


3. ‘민요시인’ 김소월의 발굴과 ‘민요시’


    1922년 7월 <개벽> 25호에 발표된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1923년 8월 <신천지>에 발표된 「왕십리」에는 ‘민요시’라는 명칭이 부기되어 있었다. 이는 한국문학사에서 ‘민요’와 ‘자유시’라는 두 양식의 접합을 공식적으로 보여준 첫 사건이었다. ‘민요시’라는 명칭은 김소월이 직접 붙였다기보다는 스승인 김억에 의해 붙여져서 발표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아직 민요시라는 명칭이 정착되지 않았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김소월 시의 특질을 설명하는데 아주 성공적이었다. 김억은 1923년 12월의 평론에서 김소월의 「삭주구성」 등의 작품에 대해 “재래의 민요조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도 아리땁게 길이로 짜고 가로 엮어 고운 조화를 보여”주었던 작품으로 평하면서 김소월을 민요시에 특출한 재능이 있는 ‘민요시인’으로 규정하였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寧邊의 藥山

진달내꽃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거름거름

노힌그꼬츨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

― 김소월, 「진달내꽃」 전문

     

    1924년 김억은 번역시집 <잃어버린 진주>를 발간하면서 「서문 대신에」라는 글에서 ‘민요시’를 범주화시킨다. 그는 시를 서정시, 서사시, 희곡시로 나누고, 서정시 중 민요시를 미래시, 입체시, 자유시, 상징시 등의 근대적인 시 장르와 대등한 하나의 양식 개념으로 범주화시킨다. 특히 그는 민요시를 자유시와 대등한 것으로 보는데, 그는 이 글에서 자유시의 특색은 모든 형식을 깨뜨리고 시인 자신의 내재율을 중요시하는 것에 반해, 민요시는 이와 반대로 기존의 전통적 시형을 밟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김억은 자유시의 방만해진 시형과 일본 신체시의 모방이라는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민요시’를 제안한 것이다.

    주요한 역시 민요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는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조선문단> 1~3호, 1924. 10~12) 연재를 통해 “우리가 가진 유일한 발족점이 한시도 아니오 시조도 아니오 민요와 동요”이며 “조선말로 쓴 노래가 조선 사람의 가슴에 먼저 울리기 전에 예술적 가치가 생길 것”이라고 주장하며 민요를 조선 민족의 근원으로 삼고자 했다. 그는 “조선의 피가 뛰는 민요”로서 민요를 새로운 자유시의 ‘발족점’으로 삼고자 했으며, 동시에 장르의 보편성 문제도 함께 다루었다. 슬라브 예술이 슬라브 예술이라는 ‘특수성’과 ‘개별성’을 확보한 다음 ‘보편성’에 나아가듯 조선문학 역시 특수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보편성을 갖게 될 것이라는 주요한의 주장은 이광수의 주장과 맥락이 비슷하다.     

    이광수 역시 민요 속에서 우리 민족의 리듬을 발견할 수 있으며, 새로운 신문학을 위해서는 민요와 전설(이야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민요와 전설이 시가에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민족적) 리듬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와 같이 조선의 민요에 나타난 리듬과 사상이 바로 조선 민족의 특색이며, 곧 조선의 문학이 민요에 기초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순전히 조선어로 된 민요만을 조선 시가의 ‘뿌리’로 보면서, 조선의 민요 몇 편을 예로 들며 민요의 리듬에 나타난 ‘느림’과 ‘즐거움’ 등을 조선 민족의 속성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민요시의 기본적인 속성을 ‘노래’로 규정하면서 시의 음악적 요소를 복원함으로써 서구로부터 이식된 자유시와 다른 조선만의 신시(新詩)를 창조할 수 있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그는 ‘우리 민족의 감정이 흐르는 모양’을 ‘리듬’이라고 명명하며, 비로소 한국문학사에 ‘리듬’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최남선 또한 “조선은 민요의 나라”라는 표현을 쓰면서 조선인은 음악적인 국민이기 때문에, 조선인 본래의 사상과 경향이 민요에 담겨 흐른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비록 일본에 의해 민요가 ‘발견’되었지만, 이러한 전통문화의 재발견은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을 구체적, 실증적으로 바라보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즉, 민요시론 전개를 통해 근대문학이라는 개념, 신시라는 장르, 리듬이라는 구체적인 시창작법과 시론이 제기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미적 근대성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4. 김억의 유행가 창작과 격조시형

    

    1934년 6월 폴리돌 레코드(Polydor Record)에서 한 장의 유성기 음반이 발매된다. 이 음반에는 김억 작사, 이면상 작곡, 일본 포리도-루조화악단(調和樂團) 반주로, 선우일선(鮮于一扇)이 부른 「꽃을 잡고」가 수록되었다. 이 노래는 당시 약 5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할 만큼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신문에도 여러 차례 음반 광고가 게재되었고, 당시 17세였던 평양기생학교 출신의 가수 선우일선도 이 한 곡으로 일약 인기가수로서 스타 가수의 반열에 올라, 1935년 10월 <삼천리>의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김억은 73편의 유성기 음반의 가사를 발표하는데, 그 가운데에서 스스로 ‘시’라고 밝힌 작품이 40편이나 되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1934년 2월부터 1940년 1월까지 약 6년 사이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


<꽃을 잡고> 신문광고와 폴리돌 레코드 음반

     

하늘하늘 봄바람에

꽃이 피면

다시 못니즐 지낸 그 옛날     

지낸세월 구름이라

잊자해도

잊을 길 없는 설은 이내맘     

꽃을따며 놀든 것이

어제 렷만

그님은 가고 나만 외로이     

생각사록 맘이설어

아니 우랴

안울수 없어 꽃만을 잠노라

― 「꽃을 잡고」 전문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 원곡(폴리돌 레코드음반)
https://www.youtube.com/watch?v=_IUeXtoZRF8


실버들 나릿나릿 느리운가지

휘도는 봄바람은 사랑의바람

이몸은 버들가지 그대는바람

바람이 부는대로 내가도노라     

실버들 하늘하늘 부는바람은

꽃업시 도는몸의 정향없는길

이몸은 버들가지 그대는바람

바람에 부는대로 내가가노라     

실버들 나릿나릿 느리운가지

휘도는 봄바람은 변키쉬운맘

불다가 불든대로 슬어지길내

버들은 심사설다 머리숙엿네

― 「탄식는 실버들」 전문   

  

    「꽃을 잡고」 이후 김억은 점차 7.5조의 음수율과 두운이나 각운 등의 형식을 엄격하게 지키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민요의 형식인 전체 4행이 한 연을 이루는 단시형(短詩型)인 이른바 ‘격조시형(格調詩形)’을 토대로 작사하였다. 그는 1930년 1월 16일부터 30일까지 <격조시형론소고>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는데, 그는 음악적 고려를 하지 않은 형태의 시들은 산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산문과 시의 경계 분리지점을 ‘음률적 율동’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조선어에는 고저와 장단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음절수의 정형이 음률적 효과를 가지게 된다고 피력하면서 민요에서 비롯된 ‘7.5조’를 제시한다. 5음 내지 7음이 발음상 가장 서정적이고 기수적(奇數的)이라는 것이다. 또한 숨을 쉬지 않고 연속해 서 발음할 수 있는 최대 음절수를 12음절 정도로 보고, 12음절을 두 호흡에 읽는 것을 격조시형의 표준으로 삼는다.

    김억은 1음절이나 2음절을 발음하기 위한 시간을 음력(音力)으로 보고, 음절수가 짝수일 때는 전음(全音), 홀수일 때는 반음(半音)으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전음과 반음의 집합과 조화에서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인데, 전음은 변화가 적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연속의 느낌을 주지만 반음은 뒤에 남는 반음을 휴지가 채우기 때문에 변화를 주면서 종결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가 예로 든 김소월의 「대숩풀노래」에서 “여튼물에”, “년자즐제”, “돗단배는”, “어리웠네”는 전음이 2번 반복되면서 우수조로서 음률의 ‘곡절(曲折)’이 없이 단조롭게 읽힌다면, “半달여울의”, “어걋챠 소리”, “금실비단의”, “白日靑天에”는 반음이 중간에 들어가면서 기수조로서 음률의 곡절로 인해 ‘음파의 굴곡’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쾌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억의 격조시형론은 기존의 정형률에서 제시된 음수의 문제를 감정과 호흡의 문제로 전환시키면서, ‘정형’의 문제를 음수의 고정이 아닌 (발음상의) 낭독의 문제로 변환시켰다. 다시 말해, 김억은 음력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민요에서 비롯된 7.5조가 조선 시형에 가장 적합한 율로 보는데, 이는 가창과 낭송에서 활자 중심으로 재편된 근대적 시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격조시형은 서구에 의해 새롭게 등장한 음반산업과 유성기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면서, 동시에 격조시형이 조선적 정서를 조선어로 표상 혹은 노래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김억의 ‘근대 시형 기획’이었다. 가창의 관습에서 활자 매체 보급에 따른 묵독으로의 시가 향유 방식의 전이에 따라 가창-전근대/묵독-근대의 이항구도가 구성되어갈 때, 김억은 오히려 전근대 시가 향유 방식인 가창(낭독)의 영역으로 회귀한다. 그는 감정을 투명하게 전달하는 매개인 ‘문자’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것이 실현되는 ‘음성’에 천착하면서 낭송과 유성기음반 취입 등에 몰두했던 것이다. 특히 새로운 미디어 유성기음반과 이에 따른 근대적인 음반 산업에 편입하여 최초로 선 보인 유행가의 가사가 되는 김억의 시가(詩歌)는 형식과 향유방식이라는 면에서 그 누구와도 다른 근대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발견’된 민요와 ‘발명’된 시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던 것이다.


ps : <모던걸 모던보이의 경성 인문학>(연인M&B, 2022)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6069148&tab=introduction&DA=LB2&q=%EB%AA%A8%EB%8D%98%EA%B1%B8%20%EB%AA%A8%EB%8D%98%EB%B3%B4%EC%9D%B4%EC%9D%98%20%EA%B2%BD%EC%84%B1%20%EC%9D%B8%EB%AC%B8%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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