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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Feb 08. 2022

시문학으로 읽는 식민지 인문학 6

#김소월 #진달래

1. 민족시인, 김소월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시인’ 또는 ‘국민시인’이라 불리는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1902~1934). 우리 국민들 가운데 그의 시 한 두 줄도 읊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그의 작품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고 친숙하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장삼이사(張三李四)의 흔한(때로는 매우 각별한!) 사랑, 그리움, 이별 등을 애절하게 노래한 조선 최초의 근대적 ‘연시(戀詩)’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중적 공감과 친화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을 꼽자면 한국 전통적 리듬감(민요조)을 탁월하게 구현해낸 점이다. 이에 따라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소월은 생존 당시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도 못했을뿐더러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의 스승 김억이 그를 ‘민요시인’이라고 칭하였지만, 그의 시는 당시 문단의 유행 바깥에 있었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사회주의 이론이 유입되면서 보다 ‘모던’하고 ‘이념’적인 작품들이 득세하였지만, 소월의 시는 그와 정반대의 결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소월은 관동대지진으로 일본 유학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귀향하여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업을 도왔지만,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처가가 있는 구성군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 경영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결국, 그는 1934년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여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었다. 그러나 소월은 친일 행적이 전혀 없었다. 친일하지 않고 요절한 시인. 그를 ‘신화화’하기에 충분하다.


오산학교 재학 시의 김소월(왼쪽). 자손의 진술을 토대로 만든 그림(오른쪽)


    소월은 1920년 <창조(創造)>에 「낭인(浪人)의 봄」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25년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을 시집 <진달내꽃>에 묶는다. 물론 스승 김억을 제외하고 당대 평론가나 작가 중에 소월의 시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박종화는 소월의 「진달래꽃」을 “사람으로 하야금 눈물솟는 그리고 또 다시 섭섭하고도 무엇을 일흔듯은 마음을 갓게하는 妙作”이라고 극찬하였고, 김동인은 “그는 자긔의 작품에 충실된 사람이다 朝鮮 情調를 가장 잘 理解하는 사람이고 조선 民衆과 詩歌를 접근시킬 가장 큰 人物”로 보았지만, 김기진을 비롯한 카프 진영에서는 “보잘 것이 없다”, “단순히 리리시즘인 것” 등의 혹평을 가하였고, 민요시운동을 주도하였던 주요한은 김소월 시의 탁월함보다는 “민요적 기분”만 언급하였다. 이에 소월은 절치부심한 끝에 그의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인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하면서 그동안 소외당했던 설움을 폭발시킨다.    

 

진달래꽃 초판본. 경매가 8천만 원 정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을 떠올려볼 수 있다. 당대에 무시당했던 소월은 어떻게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 되었는가. 그리고 소월이 그런 호칭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울러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이쯤 되면 소월의 작품성을 떠나 누군가가 ‘기획’하고, 어떤 특정한 이유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음모론’까지 생각하게 된다.     


2. 진달래라는 상징 

   

    소월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한 <진달래꽃>(1925),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1939), 정음사 간행 <소월시집>(1956, 1962)이 전부였고, 약 270여 편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소월은 단 한 권의 시집만 이 세상에 남긴 셈이고 사후의 시집은 <진달래꽃>의 이본(異本)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소월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혹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언급되기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 후 ‘김소월 특집’이었다. 13명의 시인과 평론가가 1959년 8월 <신문예>에서 「특집, 소월 시를 말한다」에 참여하였고, 11명의 시인과 평론가가 1960년 12월 <현대문학>에서 「소월 특집」에 참여하면서 그의 작품들이 다양하게 분석되었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소월에게 최초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한 공로자가 있었다. 바로 서정주였다. 그는 「시의 표현과 그 기술」(조선일보, 1946, 1.20~24.), 「김소월 시론」(<해동공론>, 1947. 4.) 등의 글에서 서정주는 소월 시에 나타난 그리움과 기다림의 정서를 “비애와 회고에만 젖어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적 입상(비너스)의 출현”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소극적인 형태의 현실 저항의 참된 자유의지”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소월의 대표작 「진달래꽃」을 ‘인생 여정의 기미에 통달한 정서의 시’로 평가하면서 후대에 걸쳐 「진달래꽃」은 “서정시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와 함께 조선의 여성적, 민족적, 민요적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작품 <진달래꽃> 원본. 몇 년 전에 김소월, 윤동주 등의 원본 시집이 영인본으로 발간되어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를 민요조의 율격에 담은 격조 높은 시”(김윤식 외, <디딤돌문학>, 고등 18종 문학교과서 자습서, 2002)라는 교과서 혹은 교육계의 정의가 말해주듯이 「진달래꽃」이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는 것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 보편의 정서는 ‘진달래’라는 소재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작품에 표현되고 있는 특정한 정서(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국인(조선인) 대표적인 정서 ‘한(恨)’ 역시 일제 식민 담론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이 소월의 탁월한 작품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쉽게 생각‘되는’ 고정-관념에 대해 재고(再考)할 기회를 갖고자 한다. 먼저 ‘진달래’라는 소재에 대해 생각해보자.

    진달래는 봄이 되면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친숙한 꽃이다. 진달래는 메마르고 각박한 땅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강한 생명력과 번식력을 갖고 있어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겨레와 애환을 함께 하며 살아온 한국의 꽃이다. 그러나 진달래꽃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근한 꽃으로 인정받고, 전통적 정서와 이미지를 가진 문학적 소재로 간주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진달래꽃은 두견화(杜鵑花), 척촉(躑躅)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중국 촉나라 임금 망제가 패망한 후 복위를 꿈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그 넋이 두견새가 되었고, 두견새는 촉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으로 ‘귀촉(歸蜀) 귀촉(歸蜀)’ 하면서 피맺힌 울음을 울었고, 그때의 피가 스민 땅에서 두견화라는 붉은 꽃이 피었다는 것이 두견화의 전설이다. 두견화는 동양의 시가(詩歌) 문학에서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한(恨)이 세계를 바꾸고 몸을 바꾸어서까지 나타나는 슬픔과 원한의 상징인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진달래.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오늘부터 새롭게 바라보시길.


    진달래가 예술 장르의 소재로 쓰이기 시작한 연원을 추적해보면 삼국유사의 「헌화가」나 고려가요 「동동」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바친 척촉(躑躅)이라는 꽃이 바로 진달래의 한자 표기이고, 서거정의 한시 「척촉화」, 구전되는 노래 「화전가」나 가사 「노처녀가」, 민요 「꽃노래」 등등 오랜 세월을 거쳐 진달래는 강한 생명력과 슬픔 등을 형상화하는 민중적 소재였다. 본격적으로 진달래가 근대 문학에 등장하게 된 것은 소월의 작품을 비롯해 이원수의 동요 「고향의 봄」(1926), 박팔양의 「봄의 선구자」(1930), 모윤숙의 「진달래 운명하네」(1931), 서정주의 「귀촉도」(1948), 이영도의 「진달래―다시 4ㆍ19날에」(1968) 등 수없이 많은 작품에 진달래가 등장한다.     


진달래꽃은 봄의 선구자외다.

그는 봄의 소식을 먼저 전하는 예언자이며

봄의 모양을 먼저 그리는 선구자외다.

비바람에 속절없이 지는 엷은 꽃잎은

선구자의 불행한 수난이외다.     

어찌하여 이 가난한 시인이

이같이도 그 꽃을 붙들고 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 선구자들 수난의 모양이

너무도 많이 나의 머릿속에 있는 까닭이외다.

― 박팔양, 「봄의 선구자」 부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지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 서정주, 「귀촉도」 전문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 날 쓰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 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 이영도, 「진달래―다시 4.19날에」 전문

     

    진달래는 크게 나누어 두견화(杜鵑花), 척촉(躑躅) 등 슬픔의 이미지와 부정적 현실을 초극하려는 희망의 이미지로 작품에 등장한다. 대체로 슬픔의 이미지에는 그리움과 기다림의 정서가 연관되어 있고, 희망의 이미지에는 식민지 조선이나 4.19 등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강렬함과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정서가 연관되어 있다. 특히 이영도의 시조 「진달래」가 매년 4월 19일 서울 수유리에서 4.19 혁명 기념식이 있을 때마다 자주 불리던 노래 가사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오.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이은상, <사월학생혁명 기념탑문>, 1963)는 구절처럼 진달래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 ‘한(恨)’을 담고 있는 소재였다.     


3. 만들어진 정서, ‘한(恨)’    

 

    ‘한(恨)’이라는 말은 한국문화와 한국예술의 특성과 정체성을 언급할 때 빠짐없이 등장한다. “시가문학의 정통적 전래 정서”(김열규, <한국문학의 두 문제>, 1985, 학연사)라는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한(恨)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해온 유전인자로서 우리 문학의 원형(Archetype)처럼 여겨지고 있다. 특히 문학에서 한(恨)은 소월의 시를 필두로 논의되는데, “소월은 바로 우리 민족의 심층에 전승되고 있는 이 같은 한의 감정을 시화했기 때문에 민족적인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오세영, 「한의 미학-소월시 축제 심포지엄」, 오산학교, 2005. 4. 16.) 등의 언급처럼 ‘소월 시=한(恨)=조선민족’이라는 등식이 학계와 대중에게 일반화되었다. 그렇다면 ‘한(恨)’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한(恨)에 관한 학계나 문단의 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한(恨)’이나 ‘정한(情恨)’의 용어로 소월을 위시한 시가문학에서 논의한 것, 다른 하나는 한(恨)을 ‘원한(怨恨)’의 관점에서 서사문학(예컨대, 판소리)을 논의한 경우다. ‘한(恨)’이란 글자를 살펴보면, 마음 심(心) 변(忄)에 한정할(될) 간(艮), 그칠(머무를) 간(艮)으로 되어 있다. 즉, 마음이 나아갈 바가 가로막힌 상황, 마음의 움직임이 정지된 상황이다. 따라서 ‘한이 맺히(힌)다’는 마음이 벽(한계)에 부딪쳐 방향을 잃고 얽히고 엉킨 상태, 퇴로(방향)가 막혀 고착되고 굳어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恨)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마음의 응어리’라고 할 수 있는데, 압박과 구속에서 오는 부정적 의미를 원한이라고 할 수 있다면, 스스로 상정한 목표가 장애로 인해 달성되지 않을 때를 정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신분제와 남성 중심사회 속에서 구속받고 차별받은 여성의 한은 ‘원한’(오뉴월 서리)에 가까우며, 남녀의 이별과 그리움은 ‘정한’(예술로 승화)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과 비슷한 예술 개념으로 멜랑콜리(melancholy),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 비극(悲劇, tragedy) 등을 나열할 수 있는데, 문제는 한국의 한(恨)에는 일종의 패배감 혹은 적대감이 숨겨 있다는 것이다. 미국 여성 작가인 다이앤 존슨(Dane Johnson)은 한을 키워드 삼아 맨부커 국제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을 분석하면서 한을 “일종의 유니크한 한국인의 민족적 특성 혹은 정신 상황으로서 타인들이나 나라의 적 혹은 역사 그 자체에 대한 특유의 분노”로 정의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한은 보편적 슬픔과 함께 식민 담론 혹은 여성 담론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에 의해서 한(恨)은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이 되어버린다.     


조선의 온 백성이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는 것은 끝없는 원한이며 반항이며 증오다. 그리고 분리다. 사람은 사랑 앞에서는 순종하나, 억압에 대해서는 완강하다. 일본은 그 어느 길을 따라 이웃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것일까. 평화가 바라는 바라면 무엇 때문에 어리석게도 억압의 길을 택하는 것일까.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을 생각한다」, <조선과 예술>, 범우사, 1989.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 나중에 '한'과 관련된 자신의 이론을 취소했지만, 조선의 지식인은 그의 미학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게 문제!!


    야나기 무네요시는 1919년 3.1운동 직후 5월 20일부터 24일까지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한다」는 글을 연재하였고, 조선의 ≪동아일보≫ 1920년 4월 12~18일자에도 그의 글이 번역되어 재연재되었다. 그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무단통치를 비판하고 조선인의 고통에 대해 동정과 위로의 눈빛을 보내지만, 결국 그 동정 어린 눈빛 역시 식민 담론의 연장 아니, 확실한 이론이 되어버렸다.     

 

흰옷은 언제나 상복(喪服)이었다. 쓸쓸하고 부끄럼 많은 마음의 상징이었다. 백성을 흰옷을 입는 것으로써, 항상 상복을 입고 있는 셈이다. 그 민족이 맛본, 고통 많고 의지할 데 적은 역사적 경험이 그러한 의복을 입는 것을 관례로 만든 것은 아닐까. 색이 결핍되어 있음은 생활의 즐거움을 잃은 분명한 증거가 아닌가.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의 미술」, <조선과 예술>, 범우사, 1989


요미우리신문의 <조선인을 생각한다>(왼쪽), 동아일보의  <조선인을 생각함>(오른쪽)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해 조선의 미(美)가 발견된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미(美)는 슬픔을 기본 정조로 하는데, 그 슬픔은 역사적 비극이 많은 민족이기 때문에 발현되는 것이고, 그 슬픔의 형상을 여리고 나약한 여성의 이미지로 치환시킨다. 이에 따라 일본=남성, 조선=여성이라는 구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수 있었으니, 한(恨)이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는 앞으로 좀 더 민감해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월은 어떻게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 되었을까. 문단과 학계에서 그와 같은 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에, 소월의 작품은 이미 ‘정전(正典)’이 되었다. 미군정기 국정 국어 교과서 상권(1946)에 「엄마야 누나야」가, 하권(1947)에 「초혼」이 실렸고, 1963년부터 시작된 제2차 교육과정 국정 국어 교과서 1권에 「금잔디」, 2권에 「진달래꽃」이 실리면서 현재까지 소월의 작품은 교과서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광복에 이은 한국전쟁이라는 극심한 혼란기를 지나면서 한국은 급하게 교과서를 만들어야 했는데, 한국 전통성과 민족성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시작품이 필요했고, 한국의 미학이라 여겨지는 한(恨)의 정서에 적합한 작품으로 소월의 시가 적격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소월의 작품은 좌우 진영 논리와 전통과 현대 논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민족문학’, ‘순수문학’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작품이 회자되고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친일도 하지 않았고, 요절했다는 그의 전기적 사실도 정전화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국 문단과 학계는 소월의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출처 불분명한 한(恨)이라는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했던 것이고, 그것이 지금까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4. 다시, 김소월  

   

    물론, 소월이 남긴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재론할 여지가 없이 뛰어나다. 문학적, 미학적 성취도 혹은 완성도에 있어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소월의 작품을 ‘님=조국(민족)’이라는 등식으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려는 ‘민족시인’이라는 욕망으로만 읽는다면, 소월 역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소월을 무시했던 그 당시나, 소월의 작품을 편협하게 읽으려는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면, 소월은 다시 한번 ‘시혼(詩魂)’을 일갈(一喝)할 것이다. 그의 시론처럼 그의 작품은 민족이나 전통 ‘따위’와 별개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소월의 개성이 아니라 작품의 개성이며, 소월의 시혼이 아니라 작품의 시혼이다. 

    소월의 시가 정치적 의도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렸기 때문에 우리가 애송하고 낭송하는 것은 아니다다만 소월의 시를 통해소월의 시를 위해 ()’이라는 개념이 무분별하게’ 출현하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이다진달래라는 상징이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에게 쓰였다. 진달래는 우리 민족, 우리나라의 비극적 상황과 감정 그 자체를 표상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왜 진달래가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지 원인과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진달래는 원형 상징이 아니라 인습(좀 더 쓰자면 문화 상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우리는 한의 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우리 스스로를 패배자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원하는 타자만 있을 뿐이다. 소월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ps : <모던걸 모던보이의 경성 인문학>(연인M&B, 2022)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6069148&tab=introduction&DA=LB2&q=%EB%AA%A8%EB%8D%98%EA%B1%B8%20%EB%AA%A8%EB%8D%98%EB%B3%B4%EC%9D%B4%EC%9D%98%20%EA%B2%BD%EC%84%B1%20%EC%9D%B8%EB%AC%B8%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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