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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Feb 18. 2022

시문학으로 읽는 식민지 인문학 7

#정지용 #파라솔

1. 모던 걸 패션 아이템, 양산

    

    1908년 이화학당에서 여학생들의 쓰개치마 사용을 금하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했다. 뒤이어 1908년 연동여학교, 1911년 배화학당에서 쓰개치마를 ‘OUT’할 것을 교칙으로 정했다. 그동안 조선의 여성들은 외출할 때 ‘무조건’ 장옷 혹은 쓰개치마를 써야 했다. 조선 사대부 전통에 의한 ‘부녀자 내외법’에 따라 조선의 여성들은 아랍권의 ‘히잡(Hijab)’처럼 얼굴을 가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부터 외국의 선교사들이 조선 길거리에서 비가 올 때마다 우산을 쓰기 시작했고, 일본에 건너간 조선 유학생들도 일찍부터 ‘우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900년대 초반 조선에서는 우산을 쓸 수 없었다. 하늘에서 내린 비를 가리는 것을 불경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도롱이와 삿갓 따위로 얼굴만 가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화학당, 연동여학교, 배화학당의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여학생 부모들의 반대가 심해 자퇴생이 늘었고, 이를 보다 못한 배화학당에서는 1914년 쓰개치마를 벗는 대신 우산을 하나씩 내주어 외출할 때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했다. 1913년 배화학당 여학생들은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세검정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그리고 신식여학교에서 쓰개치마 대신 궁여지책으로 쓰게 된 이 우산은 이른바 ‘경성시대’ ‘모던 걸’의 최첨단 아이템이 되었다. 박쥐가 날개를 펼친 모습과 같아서 ‘박쥐우산’ 또는 ‘편복산(蝙蝠傘)’이라 불렸던 우산은 이후 여학생들과 일반 부녀자들에게 크게 유행하였고, 모던 걸의 필수품이 되었다. 물론 당장 쓰개치마가 사라지고 모든 여성이 얼굴을 드러내며 당당히 길을 나섰던 것은 아니다. 양복과 한복, 우산과 쓰개치마가 공존하다가 차츰 ‘신여성’들이 조선의 길거리를 ‘당당하게’ 활보하게 되었다.


1920년대 쓰개치마를 입고 외출중인 여성과 편복산을 쓴 여성

 

“녯날 말로는 소위 박쥐산, 지금 시체ㅅ말로 양산(陽傘)이란 양산 그것 말이다. 이것이 이름만이야 볏을 가리우는 양산이지만 실용(實用)에야 어대 양산이든가? 장옷, 쓰개치마를 갓버섯슬 때에는 양산들은 사람의 얼골 가리고 내외하는 장옷의 대용(代用)이오 치마ㅅ단이 정갱이우로 올라와 새로 모던껄이란 신술어를 듯게 된 오늘날에 와서는 양산이 일종 장신구(裝身具)의 치레ㅅ거리가 아닌가?”
― 「變遷도形形色色 十年間流行對照」, ≪동아일보≫ 1930. 4. 3.    


    동아일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양산은 햇빛을 피할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치맛단이 정강이 위로 올라가는 모던 걸의 패션 아이템(장신구)이 되었다. 뒤이어 “시대의 류행은 먼저 녀자의 머리부터 시작되는 것 갓다”는 동아일보의 언급은 그 당시 양산을 비롯한 신여성 패션 아이템들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식이 구식이고 구식이 신식되니 류행이야 류행을 딸흘 뿐”이라는 이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2. 정지용의 파라솔


    유행에 민감한 사람은 ‘패션 피플’뿐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지식인들과 문필가들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에게는 유행을 선도해야 할 의무와 권리도 함께 주어졌다.


1930년대 모던보이, 모던걸의 핫플레이스 미쓰코시백화점 옥상 카페


    절제된 시어로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역시 유행에 매우 민감했다. 인쇄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그리고 독자 수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신문과 잡지 등은 그림과 글을 함께 게재하였는데, 정지용은 ≪中央≫(1936. 6.)에 ‘시화 순례(詩畵巡禮)’라는 제목 아래 장발의 그림과 산문 그리고 작품 「명모(明眸)」를 발표하였고, 이후 시집 <백록담>(1941)에 「파라솔」이라는 제목으로 수정되어 재수록하였다.

    「명모(明眸)」가 게재된 ≪중앙≫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 시화순례

 ‘시화순례’라는 제목이 있고 오른쪽 여백에 화가 장발이 그린 여성 전신 스케치가 있다. 양장 스커트에 구두 차림을 한 신여성의 측면을 그린 것으로, 간략하고 생략적인 스케치화이다. 시 「명모」는 왼쪽 상단의 박스 안에 편집되어 있고, 다음 이어지는 면에 상단에는 「명모」의 나머지 부분이 편집되어 있고, 하단에는 정지용의 산문이 편집되어 있다. 정지용의 산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畵室에 闖入할 때 죽어도 쵀플에서 나온 뒤 敬虔을 준비하기로 했다.

畵室主人의 말이 그림을 그리는 瞬間은 祈禱와 彷佛하다고 하기에 대체 웨이리 莊嚴하여게시오 하는 反感이 없지도 않었으나 畵室의 禮儀를 蹂躪할만한 밴댈리스트가 될수도 없었다.

畵室에서 畵家대로의 畵家主人은 비린내가 몹시 났다. 모초라기 비듥이 될수있는대로 간엷흔 무리를 쪽쪽 찢고 째고 점이고 나오는 庖丁과 少許 다를리없었다. 通景과 展望을 遢斷한 뒤에 人體構造에 精通할 수 있는 閑散한 外科醫이기도 하다.

미켈안젤로 따위도 이런 지저분한 種族이었던가.

기름뗑이를 익여다부치는것은, 척척 익여다부치는데 있어서는 미장이도 그러하다. 미장이는 어찌하야 애초부터 優越한 矜持를 사양하기로 하였던가. 外壁을 바르고 돌아가는 미장이의 하루는 沙漠과 같이 陰影도 없이 희고 고단하다.

嗚呼 白晝에 瞠目할만한 일을 보았다. 激烈한 恥辱을 견듸는, 에와의 후예가 떨고 있다. 화실의 敬虔이란 緊急한 精神防衛이기도 하다. 한 개의 뮤-쓰가 誕生되랴면, 女人! 그대는 永遠히 希臘的奴隸에 지나지 아니한가. 가장 아름다운것이 製作되는 동안에 가장 아름다워야할 자여! 그대는 山에서 잡혀온 小鳥와 같이 부끄리고 떨고 含淚한다.     


    장발의 화실과 관련되어 보이는 산문에서 화실이 ‘채플’처럼 ‘경건’하다는 것은, 장발이 주로 성상화가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추측 가능하다. 여기서 정지용이 화실에서 “백주에 당목할 만한 일”이란, 화폭에 그려진 한 여성 인물화 혹은 인물화의 대상이었던 모델이었을 것이며, 그 ‘여인’의 아름다움과 동시에, 화가의 치열하고 고단한 예술 행위에 대한 찬사가 함께 드러나고 있다. 즉, 「명모」는 정지용이 ‘신여성’의 아이템 ‘양산(파라솔)’을 염두에 두고 장발의 여성 스케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시를 창작했던 것이다. 


1937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무용가 최승희 단체사진. 모던하시다!!


    후에 정지용이 작품의 제목을 ‘파라솔’로 바꾼 것은, 당시 파라솔이 신여성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되었던 필수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여성’에 대한 장발의 그림과 정지용의 산문을 염두에 둘 때, ‘파라솔’로 작품 이름을 바꾼 것은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신여성의 이미지를 드러내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모던 보이 정지용


    그러나 「明眸/파라솔」에 대한 그간의 해석은 논의가 분분하다. 「유선 애상(流線哀傷)」(1936)과 함께 정지용의 대표적인 난해시 2편 중 1편인 「明眸/파라솔」은 아직까지도 해석이 불충분하다. 「明眸/파라솔」을 “어떤 여인을 염두에 두고 시를 쓴 것”으로 보거나, “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성은 윤전기 앞에서 일하는 직장 여성”으로 “싱그러운 표정과 밝은 모습이 차분하게 그려”진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당대의 신여성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연꽃을 구심점으로, 연못과 그 위를 호들갑스럽게 헤치며 다니는 백조 떼로 구성된 풍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양한 논의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명모(明眸)’의 뜻인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여성)’를 고려하여 시를 해석하거나, 원제목보다는 개제목인 ‘파라솔’에 주목하여 이미지를 추적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논의들은 시에 등장한 여러 이미지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고, 시적 대상을 하나로 고정화시키고 추적하려는 한계를 드러냈다.  

    

蓮닢에서 연닢내가 나듯이 

그는 蓮닢 냄새가 난다.     


海峽을 넘어 옮겨다 심어도

푸르리라, 海峽이 푸르듯이.  

   

불시로 상긔되는 뺨이

성이 가시다, 꽃이 스사로 괴롭듯.     


눈물을 오래 어리우지 않는다.

輪轉機 앞에서 天使처럼 바쁘다.     


붉은 薔薇 한가지 골르기를 평생 삼가리,

대개 흰 나리꽃으로 선사한다.     


월래 벅찬 湖水에 날러들었던것이라

어차피 헤기는 헤여 나간다.   

  

學藝會 마지막 舞臺에서

自暴스런 白鳥인양 흥청거렸다.    

 

부끄럽기도하나 잘 먹는다

끔직한 비―프스테이크 같은것도! 

    

오피스의 疲勞에

태엽 처럼 풀려왔다.

      

램프에 갓을 씨우자

또어를 안으로 잠겄다.    

 

祈禱와 睡眠의 內容을 알 길이 없다.

咆哮하는 검은밤, 그는 鳥卵처럼 희다.     


구기어지는것 젖는 것이

아조 싫다.     


파라솔 같이 채곡 접히기만 하는 것은

언제든지 파라솔 같이 펴기 위하야―

― 「파라솔」 전문(<백록담>, 문장사, 1941) 

    

    정지용의 산문에 나타난 정서와 연관 지어 「明眸/파라솔」을 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작품에 드러난 여성의 이미지를 화실에서 “백주에 당목할 만한 일”, 즉 누드모델로 추정되는 여성 모델과 연관시킬 수 있다. “海峽을 넘어 옮겨다 심어도/ 푸르리라, 海峽이 푸르듯이” “불시로 상긔되는 뺨”과 “눈물을 오래 어리우지 않는다” 등의 표현은 산문에서 대상화된 여성 이미지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장면이 전환되는 5연과 6연에서는 화가와 모델의 관계를 연상하게 한다. “外壁을 바르고 돌아가는 미장이의 하루는 沙漠과 같이 陰影도 없이 희고 고단하다”는 산문의 진술처럼, “붉은 薔薇 한가지 골르기를 평생 삼가”해야 하며 “흰 나리꽃으로 선사”하고, “벅찬 湖水에 날러들었던 것”처럼 화가의 고단한 창작 행위가 ‘고단함’과 ‘흰색’의 이미지로 산문과 시에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여성은 7~8연의 언술처럼 “自暴스런 白鳥인양 흥청”거리기도 하고, ‘끔직한 비프스테이크 같은 것’을 “부끄럽기도하나 잘 먹는” 장발의 그림에 나타난 신여성의 인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전환되는 9~10연의 공간은 산문에 나타난 “그림을 그리는 瞬間은 祈禱와 彷佛”한 공간과 유사하다. ‘오피스’를 ‘화실’로 본다면, “램프에 갓”을 씌우고, “또어를 안으로 잠”구는 것은, ‘莊嚴’한 화실의 광경과 흡사하다. 또한 “輪轉機 앞에서 天使”를 여성 모델로 볼 수 있다면, ‘오피스’를 여성 모델을 효과적으로 그리기 위한 시적 장치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에 따라 “祈禱와 睡眠의 內容을 알 길이 없다”는 말은 기도를 방불케하는 화실의 풍경과 화가의 경건함과 연관 지을 수 있고, “咆哮하는 검은밤, 그는 鳥卵처럼 희다”는 표현에서, 여성 모델 혹은 그려지고 있는 여성 그림을 연관시킬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의 관점인데, 시적 주체는 1~2연까지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시적 대상을 관찰하다가, 3~5연에 이르면, 여성의 내면 혹은 화가의 내면을 전지적인 시점에서 진술해간다. 그리고 다시 6~11연에서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12~13연에서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화자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노출된다. “구기어지는것 젖는 것이 아조 싫다”와 “언제든지 파라솔 같이 펴기 위하야”라는 진술은, 여성의 신체와 관련된 표현일 수도 있고, 화가의 경건한 창작 활동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으며, 시적 대상을 향한 시적 주체의 정서를 표현한 것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던 보이 정지용. 똘망똘망하게 생기셨다. 


4.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시대

 

    정지용의 또 다른 난해시 「유선애상(流線哀傷)」 역시 의견이 분분하다. 시의 소재를 ‘오리’로 파악하거나, ‘자동차’라는 의견도 있다. 특히 황현산은 이 시가 ‘자동차를 하루 빌려 타고 춘천에 갔던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1930년대 서울에는 100여 대의 택시가 있었으며, 그 자동차들은 대개 ‘유선형’의 몸체를 지녔다는 것이다. 또한 거리에 버려진 현악기를 주워와 연주했다는 한 토막 사건을 두고 꾸며진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자동차’나 ‘담배 파이프’, ‘자전거’, ‘안경’ 등 정지용이 그려낸 ‘유선형(流線型)’이 무엇인지 여전히 논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다만, ‘유선형’이 1930년대의 유행 담론의 하나였으며, 단순히 유선형 물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방식, 사고방식, 가치관, 유행 패션 및 스타일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신문 자료를 보면 ‘유선형’ 담론의 유행을 실감할 수 있다.


1930년대 고적유람 택시

    다시 말해, ‘유선형’이라는 당시 문화적 현상 또는 근대적 대상과, ‘애상’이라는 보다 근대적이지 못한(전통적 혹은 전근대적) 일반의 감정이 양립할 수 없는 상황을 인식하고 있는 정지용 역시 유행에 매우 민감했던 것이다. 파라솔(양산)이 그렇고, 「유선애상」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문물들은 당대의 패션 피플들에게도, 시인에게도 꽤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시인 정지용에게 있어 당대의 유행에 대한 인식은 일반인과 조금은 남달라 보인다. 신여성에 대한 이해와 근대적인 것과의 모순 혹은 분열된 인식이 작품에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긍정이나 부정, 신비화나 고단함의 양가성이 동시에 드러나면서도, 근대적 경험에 대한 정지용의 복합성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1930년경 명동 입구


    아직은 갓 쓰고 한복을 입고 다니는 남성들과 양장점에서 구입한 양장을 입는 여성이 함께 길을 걷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시대였다. 척박한 식민지 상황에서 좌절하면서도 지식인들, 시인들 역시 모던 보이, 모던 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유행은 유행을 따를 뿐.


ps : <모던걸 모던보이의 경성 인문학>(연인M&B, 2022)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6069148&tab=introduction&DA=LB2&q=%EB%AA%A8%EB%8D%98%EA%B1%B8%20%EB%AA%A8%EB%8D%98%EB%B3%B4%EC%9D%B4%EC%9D%98%20%EA%B2%BD%EC%84%B1%20%EC%9D%B8%EB%AC%B8%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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