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론
1. 한국 문학사 최초의 詩論
한국 문학사와 대학교 문학 전공 현장에서 ‘시론(詩論)’을 꼽으라면, 단연 김준오 선생의 <시론>(삼지원, 1982)을 꼽을 것이다. 국문과 전공자라면 반드시 집에 있을 것이며, 없다면 후배에게 물려줬을 책이다. 그만큼 초심자 혹은 전공자를 위한 시 이론 입문서라 할 수 있는데, 김준오 이전에도 시론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바로 김기림의 <시론>(1947, 백양당)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 한 권의 시론”이자 “이 나라에서 자기 나름으로 근대적 시이론을 소개한 거의 유일한 존재”(송욱, 1963)라는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김기림의 시론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이었다. 물론 서양의 시이론(특히, 영미시의 주지주의)을 소개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척박한 식민지 시대에서 그만한 성과는 쉽게 평가 절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김기림의 <시론>은 김기림이 문단에 등장한 1931년부터 1947년까지 쓴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니, 한국문학사 최초의 ‘시론’이라고 말해도 문제없을 것이다. <시론>의 목차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Ⅰ. 방법론 試論
Ⅰ-1. 시학의 방법(1940.2)
Ⅰ-2. 시와 언어(1940.5)
Ⅰ-3. 과학과 비평의 시(1937.2)
Ⅰ-4. 비평과 감상(1935.11)
Ⅱ. 30년대의 소묘
Ⅱ-1. 우리 시문학과 근대의식(1940.10)
Ⅱ-2.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1939.10)
Ⅱ-3. 1933년 시단의 회고(1933.12)
Ⅱ-4. 30년대 揁尾의 시단 동태(1939.12)
Ⅲ. 感傷에의 반역
Ⅲ-1. 시와 인식(1931.2)
Ⅲ-2. 시의 방법(1932.4)
Ⅲ-3. 시의 모더니티(1932.7)
Ⅲ-4. 현대시의 표정(1933.8)
Ⅲ-5. 새 인간성과 비판정신(1934.11)
Ⅲ-6. 기교주의 비판(1935.2)
Ⅲ-7. 시와 현실(1936.1)
Ⅲ-8. 시의 회화성(1934.5)
Ⅲ-9. 感傷에의 반역(1935.4)
Ⅲ-10. 시의 난해성(1935.5)
Ⅲ-11. 객관세계에 대한 시의 이해(1935.5)
Ⅲ-12. 시의 「르네상스」(1938.4)
Ⅲ-13. 「프로이트」와 현대시(1939.11)
Ⅳ. 우리 시의 방향
Ⅳ-1. 우리 시의 방향(1946.2)
Ⅳ-2. 공동체의 발견(1946.7)
Ⅳ-3. 「전위시인집」에 부침(1946.10)
Ⅳ-4. 시와 민족(1947)
Ⅴ. 오전의 시론(1935.4.21.~10.4)
연도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각 주제에 맞는 글들을 부분별로 모았다. 주로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한 글들을 모았기 때문에 시 이론과 현장 비평이 두서없이 섞여 있다. 물론,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보다 체계적이지 못하고 짧은 저널리즘의 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한계점은 분명하게 노출되지만, 17년 동안 김기림은 ‘큰 그림(the big picture)’을 그리면서 작품 활동과 연구를 이어갔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바로 ‘전체로서의 시’라는 큰 그림이다.
비인간화한 수척한 지성의 문명을 넘어서 우리가 의욕하는 것은 지성과 인간성이 종합된 한 새로운 세계다. 우리들 내부의 「센티멘탈」한 「東洋人」을 깨우쳐서 우리는 우리 지성의 문을 지나게 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에 시가 피동적으로 현대문명을 반영함으로써 만족한다면 「흄」이나 「엘리엇」의 고전주의가 바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 속에 현대문명에 대한 능동적인 비판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 속에 현대문명의 발전의 방향과 자세를 제시하고야 말 것이다.
인용된 「오전의 시론」에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하는데, 그에 따르면, ‘전체로서의 시’는 “비인간화된 수척한 지성의 문명”을 뛰어넘어, 지성과 인간성의 종합,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종합으로 추구되는 시다. 이것은 기존의 퇴폐적, 감상적 낭만주의를 극복하고 현대문명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정신을 갖춰가는 것이자 현대문명의 방향을 제시까지 해야 했다. 이에 따라 그는, 문학사에서 그 유명한 ‘기교주의 논쟁’의 불씨를 댕기면서 카프 해산(1935. 6) 이후 잠잠했던 조선 문단에 새로운 담론을 불어넣었다. 바야흐로, 카프가 주도했던 1920년대가 저물고, 1930년대 중반부터 새 시대, 소위 ‘모던뽀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2. 시의 조종(弔鐘)을 울리며 등장한 모더니스트 김기림
김기림은 1908년 함북 성진에 출생하여 1925년 일본 도쿄의 메이쿠(名敎) 중학 4학년에 편입하였고, 1926년 니혼(日本) 대학 예술학부에 입학하여 영문학과 예술 각 분야를 학습했다. 1929년 4월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일보사 기자로 근무하면서 ‘G. W’라는 필명으로 1930년 9월 6일 자 조선일보에 시 「가거라 새로운 生活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인으로서의 행보를 떼게 된다. 그리고 1931년 1월 16일 자 조선일보에 「詩論」이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 여러분 ―
여기는 發達된 活字의 最後의 層階올시다
單語의 屍體를 질머지고
日本 조희의
漂白한 얼골 우헤
꺽구러저
헐떡이는 活字 ―
〔……〕
나기를 넘우 일즉히 한 것이여
생기기를 넘우 일직히 한 것이여
感激의 血管을 脫腸當한
죽은 「言語」의 大量産出 洪水다.
死海의 汎濫―警戒해라
詩의 宮殿에―骨董의 廢墟에
詩는 窒息햇다
「안젤러쓰」여
先世紀의
오랜 廢人
詩의 弔鐘을
울여라
千九白三十年의 들에
藝術의 무덤우에
우리는 흙을 파언자
―「詩論」(≪조선일보≫, 1931. 1. 16) 앞부분
김기림이 보기에 그동안 조선 문단의 시는 “감격(感激)의 혈관(血管)을 탈장당(脫腸當)한 죽은 언어(言語)의 대양산출(大量産出) 홍수(洪水)”이자 “사해(死海)의 범람―경계(汎濫―警戒)”처럼 처참했다. “골동(骨董)의 폐허(廢墟)에 시(詩)는 질식(窒息)했다”, “시의 조종(弔鐘)”을 울려야 한다는 그의 무척 강한 비판과 더불어, 「詩論」의 뒷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一喝)하며 자신의 등장을 화려하게 알린다.
한개의
날뛰는 名辭
금틀거리는 動詞
춤추는 形容詞
(이건 일즉이 본 일 업는 훌륭한 生物이다)
그들은 詩의 다리(脚)에서
生命의 불을
뿜는다.
詩는 탄다 百度로 ―
빗나는 「푸라티나」의 光線의 불길이다
명사가 날뛰고 동사가 꿈틀거리며 형용사가 춤을 추는 시, “일즉이 본 일 업는 훌륭한 생물(生物)”로서의 시, 생명의 불을 뿜으며 스스로 타는 시. 물론 작품에서 직접 형상화내지는 못했지만, 그가 앞으로 어떤 글을 쓸지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뒤이어 그는 비평 「시의 방법」(1932. 4)에서 “우리 시단은 격정적인 「센티멘탈」한 이 종류의 너무나 소박한 詩歌의 홍수로써 일찌기 범람하고 있었다. 시인은 한개의 목적=가치의 창조로 향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의도된 가치가 시로서 나타나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센티멘탈(감상성)’을 타도해야할 것으로 보고, 시인의 목적과 태도가 분명하게 시에 나타나야 할 것을 주장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모더니스트로서의 김기림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바로 임화와 박용철과의 논쟁(배틀)이다!
3. 1930년대 조선문단 = ‘모더니즘 문학 vs 리얼리즘 문학 vs 순수 문학’
최남선에서 출발한 1920년대 신시(新詩)와 카프의 경향시로부터 1930년대 조선 문단의 ‘현대시(modern한 시)’가 어떻게 다른지, 1930년대 시인들은 ‘스스로’ 제시해야 했고 설명해야 했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는 모던한 시, 새로운 시의 전범(典範)이 필요했고, 이에 정지용과 신석정이 호명을 받게 되었으나, 임화가 반발하면서 ‘기교파’와 ‘경향파’라는 두 분파가 만들어지게 된다. 바로 ‘기교주의 논쟁’의 발발(勃發). 김기림과 임화의 논쟁에 박용철이 합세하면서 1930년대 조선문단의 구도는, ‘모더니즘 문학(feat. 김기림) vs 리얼리즘 문학(feat. 임화) vs 순수 문학(feat. 박용철)’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의 논쟁은 서로를 물고 뜯으며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던 이전의 황석우와 현철 ‘신시논쟁’과는 차원이 다르며, 또 논쟁도 비교적 정제되어 있고 날카롭다. 그만큼 성숙해진 것이다.
기교주의 논쟁은 김기림의 「시에 있어서의 기교주의의 반성과 발전」(1935. 2)이라는 글에 임화가 「담천하의 시단 1년」(1935. 12)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김기림과 임화는 충돌하고 있었다. 김기림이 「1933년 시단의 회고와 전망」(1933. 12)에서 정지용과 신석정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자, 임화는 「33년을 통하여 본 현대 조선의 시문학」(1934. 2)을 통해 정지용, 이상, 신석정, 김기림 등의 시를 신비주의(종교)와 ‘이지의 장난감’(주지주의)으로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이들의 핑-퐁 논쟁은 계속 전개되었다.
김기림은 ‘시의 가치를 기술을 중심으로 하고 체계화하려는 하는 사상에 근저를 둔 시론’을 ‘기교주의’로 명명하며 이를 비판한다. 이 기교주의는 ‘감정의 배설’로서 ‘구식 로맨티시즘’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30년대에 들어 이제는 그 역사적 의의를 잃어버리고 음악성이나 회화성을 쫓는 경향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이 김기림의 기교주의 비판이다. 이는 한국 문학사의 발전 과정에 따른 필연적인 문제였고, 그는 한국 문학사를 자세히 정리하면서 앞으로 이러한 문제점들을 타개할 수 있는 ‘전체로서의 시’를 주장하면서 논의를 마무리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임화는 김기림의 10개월 전 글에 대한 논박을 하며 1935년 시단에 대해 정리를 ‘다시’ 한다. 1935년 6월 카프 해산계를 직접 제출한 후 병석에 누운 이유도 있겠지만, 카프가 영영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기림의 「시에 있어서의 기교주의의 반성과 발전」에는 신경향파 문학, 즉 계급의 분화 과정이 언급되지 않았다! 김기림이 소외시켰던 카프의 ‘신경향파 문학’의 의의와 문학사적 위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임화는 오래된 김기림의 글을 소환해낸다.
임화는 기교파의 문제를 ‘시는 언어의 기술’, 경향파의 문제를 ‘조악한 언어상의 유산’으로 지적하면서 언어 문제를 핵심 쟁점으로 부상시킨다. 그는 정지용이나 신석정이 언어의 기교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보고, 인간의 생활과 현실에 무감각하다는 것을 기교파의 가장 큰 문제로 삼는다. 그에 따르면, 기교파는 ‘감정’이 없는 시인들, ‘감각의 시인’일 뿐이지만, 프롤레타리아 시는 현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각’이 살아 있는 시로 보았다. 그러니까 임화는 김기림의 기교주의 개념을 빌려 당시의 시단을 비판한 것이다. 임화는 30년대 시단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정지용(1935년 10월 <정지용시집>이 발간되었다!)과 신석정을 기교파의 대표로 몰아세워 이들을 비판(“똑바른 조선어를 쓰라”)하면서 카프의 신경향파 문학(리얼리즘)의 방향을 스스로 잡아나가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박용철이 등장한다. 그는 「올해시단총평」(1935. 12)에서 김기림의 ‘새로움의 추구’라는 것을 문제 삼아, “가능 이상의 속도”를 추구하는 조선 시단은 결국 과부하로 인해 작품이 “기괴(奇怪)”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임화 역시 “표제 중시의 사상”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문제 삼고, 임화가 여전히 시를 산문과 비슷한 “설명적 변설(辨說)”로 파악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비판한다. 박용철은 ‘작심(作心)’하고, 정지용의 「유리창」을 카프시와 비교하여 임화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우리가 이 시를 이삼(二三)독(讀)하는 가운데 틀림없이 사물의 본질에까지 철(徹)하는 시인의 예민한 촉감을 느낄 것이오 그 다음으로 일맥의 비애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혹시는 이 시를 논해서 <결코 감정의 정도에 오르지 않는 자연의 단편에 대한 감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시를 해설하므로 보충하려는 것이 이러한 감상의 미달이다. 그가 이 시를 쓴 것은 그가 비애의 절정에 서서 그의 심정을 민광(悶狂)하려든 때이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잃은 것이다.
그러므로 호변적(好辯的)인 시인이면 이런 때 적당히
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갔느냐 갔느냐
내일에 피여나는 힘과 젊음을 약속하는 아모 티와 흠 없는
조고만 몸아 이것이 믿을 수 있는 일이냐
네가 비록 여기 차게 누웠을지라도
너의 손은 고대 나를 잡을 것 같다.
너의 어머니의 사랑이오
나의 기쁨인 아가야
네가 참으로 갔느냐
오! 나의 찌여지는 가슴!
적당히 이렇게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 정지용은 아마 죽여도 이렇게 애호하고 호소하려 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생한 심정을 직설적으로 노출하는 것보다는 그 민민한 정을 씹어 삼키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좁은 방 키와 나란한 들창에 붙어서서 밖에 어둔 밤을 내다보며 입김을 흐리고 지우고 이렇게 작난에 가까운 일을 하는 것이다.
박용철은 정지용의 「유리창」을 카프시의 ‘설명적 변설’ 스타일로 개작하여 보여주면서 정지용의 ‘시적 언어’(추후 박용철은 ‘변용’과 ‘영감’이라는 개념으로 시적 언어를 설명한다)가 미학적으로 성공했음을 증명해낸다. 임화 역시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지만, 임화는 박용철의 시론을 ‘계시적 영감설’ 등으로 오해하면서, 박용철은 따로 자기의 논지대로 밀고 나가면서 독창적인 시론을 구축한다. 이제 김기림과 임화의 논쟁으로 좁혀지게 되었다.
4. 여전히 진행 중인 시론
가만히 살펴보면, 김기림은 한국 문학사에 기교주의 논쟁이라는 멍석을 깔아준 것처럼 보인다. 카프의 부활을 꿈꾸는 임화에게 논쟁거리를 내준 꼴이 되었고, 김기림과 임화의 논쟁은 거듭할수록 카프 스스로의 입지를 다지려는 자리가 되었다. 물론, 여기서 박용철에게는 독특한 자기만의 시론(「시적 변용」)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이러한 기교주의 논쟁은 1930년대에 이르러 가속화된 시대 변환(반일감정이 고조된 지금, 이를 ‘발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과 그에 따른 문학장에 대한 진단, 보다 ‘건강하고 명랑’한 문학사로 이어지기 위한 이들의 복잡다단한 고민들이 한데 모여 부딪치고 갈라진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삼각구도는 곧 앞으로 전개될 한국 문학사의 축소판 혹은 이정표가 되었다.
물론, 김기림이 기교주의 논쟁에서 소극적으로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논쟁 직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비평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해야 하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귀국 직후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1939. 10)를 발표하면서 그동안의 논쟁에 대한 ‘절치부심(切齒腐心)’ 끝에, 답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는 박용철이 부정확한 개념이라고 지적했던 ‘기교주의’라는 용어를 ‘모더니즘’으로 수정하면서, 임화가 기교파라 칭했던 정지용, 신석정, 이상 등의 시인을 ‘모더니스트’라고 규정하면서 이들을 재평가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전체로서의 시’를 제시하면서 기존과 다른 결의 글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시와 과학의 결합’. 21.3세기인 지금도 모더니즘은 끝나지 않았으니, 그의 시론(詩論)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ps : <모던걸 모던보이의 경성 인문학>(연인M&B, 2022)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6069148&tab=introduction&DA=LB2&q=%EB%AA%A8%EB%8D%98%EA%B1%B8%20%EB%AA%A8%EB%8D%98%EB%B3%B4%EC%9D%B4%EC%9D%98%20%EA%B2%BD%EC%84%B1%20%EC%9D%B8%EB%AC%B8%ED%9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