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은 사회적 영역까지 포괄한다
*리뷰 영화: 《우리가 여기 있다Homens Invisiveis》, 루이 카를로스 데 알렌카 Luis Carlos de Alencar 감독, 브라질, 25분, 다큐멘터리, 2019.
새해에 결심을 했던 만큼, 잘 지켜보자는 의미에서 이번 주말은 영화를 좀 여러 편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내가 즐겨하는 SNS에서 하나의 광고를 접하였다. 그건 바로 ‘2021 서울인권영화제 연말 상영회(2021. 12. 27 ~ 2022. 1. 2 진행)’에 대한 광고였다. 맨날 언제라도 망가질 것 같은 이상한 제품 광고나 마주하곤 했는데, 나름 신선한 주제의 광고인 터라, 클릭해봤다. 이것도 무슨 돈을 내라는 광고인가 의심하고 있었던 찰나, 이내 그러한 저급한 류의 광고가 아님을 깨달았다.
마치 넷플릭스 OTT 서비스처럼 서울인권영화제 홈페이지에서 ‘HRflix’를 제공하는 사이트가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무료로 감상할 수 있었다. 단편 영화도 있었으며, 중편 영화도 있었다. 아마 독자가 이 글을 읽는 시점에는 영화제 기간이 끝나버리고 난 이후일 가능성이 높겠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영화 한 편 구(입)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 아니면, 나중에 또 다시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기회를 노려볼 만도 하겠다.
아무튼, 첫 번째로 내가 시청한 영화는 바로 《우리가 여기 있다Homens Invisiveis》라는 작품이다. 이 영화제가 인권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에, 대부분의 영화들이 소수자나 약자의 인권을 주로 다루는 듯하다. 평소에 크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지만, 나 또한 여기에 대해 일말의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기에 기대감을 갖고 관람하였다. 또, 영화의 러닝타임은 26분으로 그리 부담되지 않았다.
영화 줄거리는 그야말로 ‘인터뷰’가 전부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성소수자이거나, 이와 관련하여 공부하는 사람들(교수를 비롯하여), 의사들, 행정가들인 듯했다. 이 영화가 브라질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했다. 영화를 다 시청하고, 이 글을 쓰면서 관련 자료를 조금 찾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브라질에서는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범죄와 폭력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사회적 인식이 혐오 감정으로 수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2019년부터는 극우 성향의 대통령이 부임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압력을 가한다는 분석 결과도 있다.[1][2]
이 영화의 특징은 25분 내내 인터뷰가 나온다는 점이다. 인터뷰에서는 그간 브라질 사회 내에서는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들이 정부나 사회, 공동체로부터 경험한 트라우마, 상처, 폭행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사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비단 브라질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세상 그 어디에나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시선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조차 지금까지 그러한 사람들을 듣거나, 보기라도 하면,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나 싶다. 진지하게 그들의 말을 경청할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
영화에서 한 보건소장 혹은 의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건강’의 하위 영역에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와 ‘심리적 자아’도 포함된다는 대목이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념과 기호를 실현하고 인정받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그동안 성소수자들은 전통성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존재를 부정당하여왔다. 때로는 ‘병리적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취급되는가 하면, 그야말로 ‘혐오적 대상’으로만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사회 내에서 자유롭게 드러낼 수 없었다. 언제나 심리적인 위협과 압박 속에 머무르는 ‘사라져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본 영화의 내용이 종교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최근에 나는 하나의 사건을 접한 적이 있다. 직접적인 친분은 없지만, 평소에 자주 소식을 접하는 지인에 대한 글이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인데, 어떤 인권 운동에 참여했던 신학생이 결국 목사고시 면접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은 뒤[3], 군종사관후보생의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신학생이 인권 운동을 할 때, 같은 학교의 학생은 무단으로 촬영하여 SNS에 고발성으로 올렸다고 한다. 이것이 교단 총회에 전달되어 결국, 총회에서 목사안수 자격을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일련의 사건을 목도하면서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성소수자가 신학적으로 죄인이냐 아니냐를 떠나, 이 사건은 아예 관련 담론의 말문을 차단시키는 대표적인 헤프닝으로서 충분했기 때문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가 소속한 교단인 예수교대한장로회(통합)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성도의 숫자를 보유하고 있다(240만 명)[4]. 그래도 나름 균형 있는 신학적 관점을 견지한다는 곳이 이렇게 가차 없이 마녀사냥을 하듯이 목회자를 색출한다면, 이제 대학과 교회의 설교단은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다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누군가는, 평생 숨어 지내야만 할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조차도 그들을 품어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종교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을 머릿속으로 되뇌어본다. 분명히, 그였다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권력과 명예를 거머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의 면전에서, 죄인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먼저 품어주고 이해해주지 않았을까. 한 사람의 가치를 동성애자냐, 이성애자냐의 잣대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욕심을 쫓는 지로 판단하지 않았을까. 솔직히 나는 되물어보고 싶다. 총회의 임직원들은 장로교(통합)의 최대 대형교회인 명성교회가 세습한다고 했을 때, 어떠한 결정을 내렸을까? 진정 그들이 정의를 외친다고 했다면, 신학생이 인권 운동했다고 목사 안수를 취소시키는 게 아니라, 명성교회의 두 부자(父子)를 먼저 면직시켜야 하지 않았을까?
인권과 종교는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한국 개신교는 그중에서도 더더욱 말이다. 신학대학원생이자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교회가 더 이상 ‘법원’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를 혐오하고 있다. 점점 이 사이의 간극은 멀어져만 간다. 교회가 무엇보다도 지켜야 하는 역할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현하는 일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들어주는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본 영화는 어쩌면 교회, 나아가 여느 종교 단체나 기관보다도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이 역할을 종교(인)들이 해주었으면 한다.
References
[1] 김재순, “브라질, 성 소수자 대상 폭력 범죄 기승…작년 175명 피살,” 「연합뉴스」, 2021. 01. 30. https://www.yna.co.kr/view/AKR20210130004100094.
[2] 강민수, “브라질 대법 "동성애·트렌스젠더 혐오는 범죄," 「머니투데이」, 2019. 05. 27.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9052714251083096.
[3] Mendes, W. G., & Silva, C. M. F. P. D. (2020). Homicide of lesbians, gays, bisexuals, travestis, transexuals, and transgender people (LGBT) in Brazil: a spatial analysis. Ciencia & saude coletiva, 25, 1714.
[4] 이대웅, “[통합 7] 목사고시 탈락 신학생 2인 관련 질의.” 「크리스천투데이」, 2019. 09. 24.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5530?fbclid=IwAR3btW0IB6JtXjhRQqyb5WCA2IDbIMXbD2JpLkhc16LglsvAE-QYR1Jx7a8.
[5] 최승현, “주요 6개 교단, 올해만 교인 40만 명 줄었다…10년 전 정점 찍은 후 176만 명 빠져,” 「뉴스앤조이」, 2021. 10. 07.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3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