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Dec 15. 2020

크리스마스라면 역시 이것

시나몬 가득, 알싸한 크리스마스의 향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인 척 하기를 좋아했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입맛은 전형적인 초딩 입맛이었다. 달콤하고 입에 붙는 불량 식품(!) 류를 좋아했고, 맛과 향이 강하거나 반대로 매우 담백한 것들은 먹기 싫어했다. 김치, 젓갈, 홍어 - 예시가 좀 극단적인 듯도 - 라든지 두부, 버섯, 오이같은 것들.  


중 의외로 허들이 높았던 것이 '계피'와 '생강'이었다. 코를 찌르는 듯한 새침하고 매운 향과 다 먹고 난 후 한참 뒤까지 남아 있는 한약같은 씁쓸한 맛이 괴로웠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엄마는 사탕 중에 계피 사탕을 가장 좋아했고, 생강청을 철마다 담가 생강차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부모와 나는 별개의 취향을 가진 개체라는 것을 강하게 깨달은 때가 그 즈음이다(!)


시나몬 스틱. 담배같이 생겼다.


계피, 즉 시나몬(Cinnamon)에 대한 편견을 벗어버리게 된 것은 영국에서 보냈던 어느 추운 겨울, 어느 크리스마스 마켓에서였다. 


유럽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시작된다. 한국은 12월 들어서야 크리스마스 굿즈가 진열되기 시작하지만, 영국에서는 10월 정도부터 이미 크리스마스 기운이 거리에 가득 넘친다. 아, 올해는 슬프지만 좀 달랐을 수도 있겠다. 


영국은 어둑어둑하고 나쁜 날씨로 유명하지만 기본적으로 해양성 기후라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눈이 펑펑 내리는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동네마다 크고 작은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렸다. 거기서 가장 많이 파는 음료가 따뜻한 뱅쇼(Vin Chaud), 향신료를 넣은 차(Spiced Tea), 그리고 핫초콜릿(Hot Chocolate)이다. 


그 중 내 마음을 화르륵 녹인 것이 바로 시나몬 향이 가득 하던 뱅쇼였다. 뱅쇼는 글뤼바인(Glühwein)이라고도 불리는 따뜻한 와인으로, 와인에 오렌지, 레몬, 사과 등 시트러스 류의 과일을 넣어서 끓인 음료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겨울이 되면 많이들 마시는데, 괜히 멋있어 보이면서도 사실 만들기도 쉽다. 그저 맛있게 만들기 어려울 뿐이다. 참고로 난 이전까지 항상 뱅쇼를 실패했는데, 독일에서 온 클래스메이트의 충고로 맛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친구의 말은 이랬다. - 「과일을 아끼지 마라」  「스위트 레드 와인을 쓰되, 너무 싸구려는 쓰지 마라」 


아무튼 내가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마신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티뱅쇼(Tea Vin Chaud)였는데, 뱅쇼에 시나몬 스틱을 넣는 대신 시나몬 가향차를 진하게 우려서 섞은 것이었다. 뜨끈한 와인과 섞인 과일 향에, 물씬 풍겨 오는 시나몬 향이 위장을 싹 훑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시나몬이 이렇게 매력적인 향을 가졌던가? 엄마가 건네 주는 계피 사탕에서 풍겨 오던 들큰하고 매운 단맛 - 내가 '어른의 맛'이라고 느꼈던 그 맛과는 사뭇 달랐다. 어쩌면 이것저것 섞인 음료였기에 시나몬의 그 알싸한 맛이 좀 덜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비단 크리스마스 때가 아니더라도 유럽에서는 시나몬을 베이킹이나 음료에 상당히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차와 블렌딩해서 마시는 것은 물론 우유나 커피에도 곧잘 뿌려 마시고, 빵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음식에도 곁들이는 등. 내가 계피, 시나몬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유럽인들의 시나몬 사랑은 별나게만 보였다. 


하지만 역시 크리스마스가 되면 시나몬 향이 가득 들어간 티뱅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상황상 즐거움보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게 될 것 같지만, 집의 따뜻한 소파에서 티뱅쇼 한 잔을 마시는 조용한 크리스마스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생강은 아직 극복 못했다. 진저쿠키로도 극복할 없었던 생강. 

매거진의 이전글 냉장고의 오래 묵은 차, 버려야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