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야기
대학 졸업 후 지난 10여 년의 시간들을 한 단어로 묶는다면 '인터뷰'가 적절할 듯싶다. 물론 나의 존재나 그 외의 것들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한 단어이지만. 방송 리포터로, 브랜디드 콘텐츠 에디터로, '커리어 패스'라 불리는 여정 안에서 자의든 타의든 꾸준히 해왔던 일이다. 다만 연봉이나 회사의 네임벨류, '이렇게 하면 이직을 잘할 수 있다, 일잘러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스킬' 같은 시선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은 시간들이다. 동화 같은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키워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들이 마음을 열고 들려주었던 이야기들과 그 시간들에 대한 기억 정도로 정리되면 좋겠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내가 느끼고 배운 것들을 온전히 나누고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떤 오해나 실망들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아주 오랫동안 묵혀두어 먼지가 잔뜩 쌓인 장독 뚜껑을 여는 마음으로 몇 번이나, 몇 날이나 고민을 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책상 앞에 다시 앉는 용기를 내본다. 그동안 가족과 지인들은 대학 졸업 후 지난 10년 간 나의 행보를 보며 짐작해왔을 이야기들, 겉보기에는 화려했을, 나름 치열했고 많이 불안했던, 이제야 아름다워 보이는 그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모두가 보는 공간에서는 처음으로 꺼내 정리해보는 좌충우돌 취재기와 내 속마음들이 길을 헤매고 있는 누군가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제 좀 잘 익었으려나?! 장독 뚜껑을 열어보자.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한 언론사 영상뉴스부에서 인턴을 했다. 회사는 보도채널을 준비하면서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고 생방송 뉴스를 이어갈 제작 인력이 필요했다. 언론인을 꿈꾸는 나와 같은 아해들 대여섯 명이 모였다. 그중 몇몇은 중도하차했고 몇몇은 끝까지 버텼다. '88만 원 세대'라는 책이 히트를 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80만 원도 받지 못했지만 기자, 아나운서, PD, 언론사 선배들과 생방송 뉴스를 함께 만든다는 것에 풀타임으로 6개월간 열심히 근무했다. 생방송 뉴스 스튜디오 안에서 스탠딩 카메라를 잡기도 하고 FD(Floor Director) 역할, 방송 큐시트, 원고 출력과 프롬프터 조작도 담당했다. 마지막 몇 주는 국회, 정부부처 등지 출입처를 돌며 현장 취재도 동행해볼 수 있었다. 어깨너머로 현장과 스튜디오를 누비는 선배들의 모습 위에 내 모습을 겹쳐보곤 했다.
헤드라인이라고 뉴스 앞부분에 그날 나갈 주요 뉴스 타이틀과 내용을 요약해 전달하는 꼭지가 있었는데 아나운서 지망생이었던 나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대학 방송국 아나운서로 교내 방송만 해보다가 내 목소리가 언론사의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전달된다는 것 자체에 신이 났다. 방송된 파일을 수십 번 반복해서 돌려봤던 기억이 있다. 선배들과 함께 생방송 스튜디오를 정신없이 뛰어다닐 때면 언론인이라는 꿈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6개월 근무 끝에 더 일할 생각 없냐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우리 모두는 수료증 종이를 한 장씩 받아 들고 수료인지 퇴사인지 회사를 나왔다. 그중 몇은 여전히 이 언저리에, 몇은 아예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졸업과 함께 초조한 시간이 시작됐다. 카메라 테스트 대비, 논술 작문 대비 스터디를 동시에 하며 일명 '언론고시'를 준비했다.
답부터 먼저 하면 그렇다. 요즘도 라디오를 듣다 보면 종종 조연출, 작가 등 방송 스태프들이 카메오로 출연하거나 협찬 멘트를 읽곤 한다. 그때의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되던 방송이었다. 아주 찰나 같던 그 시간이 얼마나 가슴 떨리고 설렜는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그 짧은 시간을 보며 힘들었던 조연출 일을 견뎌냈던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녹음기를 들고 인터뷰를 나섰던 것은 추운 겨울, 설특집 방송을 위해서였다. 방송 중간에 넣을 인서트(insert)로 고속터미널이나 서울역에 나가 설 풍경을 취재하는 거리 인터뷰 미션이었다. 아나운서 지망생으로 현장 리포팅 실습을 할 때 멘트 정도 연습을 해보았지 막상 녹음기 하나 달랑 손에 들고 혼자 현장으로 나가려니 막막했다. 인터뷰, 취재와 관련된 책들을 찾아 정독해보았지만 활자가 내 몸으로 구현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설 연휴 즈음의 역 대합실, 늘 분주한 곳들이기에 쭈뼛쭈뼛 마이크와 녹음기를 꺼내고 있는 나를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미리 준비했던 '인터뷰, 취재하는 법'에 대한 메모나 해야 할 질문들을 적어놓은 종이들을 암기하듯 뚫어져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한참을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다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그중 몇몇은 거절, 어렵게 입을 떼는 분을 찾아서 괜찮은 이야기가 나오려 하면 버스 시간이 다되었다며 갑자기 사라지셨고 말이 중간에 끊겨 못쓰게 되기도 했다. 성비도, 연령대도 다양하게 맞춰야 하니 몇 분짜리 인터뷰를 하러 가서 몇 시간을 헤매었다.
방송국에 돌아가 pd와 함께 편집 프로그램 앞에 앉았지만 내가 들었던 소리는 '이건 방송에 못 쓸 것 같은데'였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고성능 녹음기를 별도의 마이크 없이 사용해서 말소리뿐 아니라 온갖 소리들이 다 함께 녹음되어 있었다. 편집으로 살릴 수 있는 것들은 살리고 나는 다시 취재를 나갔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들었지만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아주 조금 나았던 것 같다. 방송은 당연히 성공적이었고 생생하게 잘 들었다는 몇몇 이야기들만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그 녹음기에 연결해 쓸 수 있는 마이크를 받게 되고 이 둘과 함께 오랜 시간을 동료로 지내면서 세상을 배웠다. 그러는 사이 1분에서 2분으로, 코너로, 내가 오롯이 맡게 되는 방송시간이 늘어났다. 거리 인터뷰부터 어린 시절 좋아하던 가수까지, 남녀노소 수천여명의 사람들을 만나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좀 더 넓은 세상을 만나기 위해 콘텐츠 에디터로 전직을 한 후에도 '인터뷰 작업'은 늘 함께했다. 녹음기를 가장 친한 동료 삼았던 이 시간들은 '나'라는 사람을 키워냈다.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되는 지금, 더 이상 '방송', '인터뷰'라는 단어는 우리 누구나에게 열려있게 되었다. 국어사전은 '인터뷰'를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개인이나 집단을 만나 정보를 수집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또는 그런 것.'으로 정의한다. 나에게 인터뷰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 그렇게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 사람만이 가진 빛을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내가 지금껏 해온 일들 중에 가장 소중한, 아니 지금껏 내가 해온 일의 전부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세상에 마이크와 녹음기만 들고 떨어진 것 같은 기분으로 시작했다. 방송을 하고 싶으면서도 부끄러움, 쑥스러움이 많은 나에게 거절당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작업들은 쉽지 않았다. '방송이 하고 싶어서', '방송이 좋아서' 견뎌낼 수 있었던 처음, 시작이 지나고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익숙함과 여유가 생겼고 그제야 즐길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해도 무작정 불특정 다수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야 하는 거리 인터뷰는 가장 고된 작업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유재석의 유퀴즈를 보며 느끼지만 우리 각자의 빛깔을 가장 잘 발견해낼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