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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SU Jan 27. 2021

사랑이라는 믿음에 대하여,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

안녕하세요. 에디터 SU입니다. 


우리는 여러 로맨스적 서사들을 접하며 자랐습니다. 어린아이들까지 흔히 접하는 만화나 드라마 속에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은 극적인 사랑에 빠져 서로를 구원합니다. 과연 현실의 연애도 그렇게 로맨틱하기만 할까요? 사랑에는 아름다운 면만 존재하는 걸까요? 여러분이 원하는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요?



오늘 함께 살펴볼 글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입니다.  인형의 집은 1989년 세상에 발표된 작품이에요. 노라라는 이름의 여성이 주인공입니다. 변호사인 헬메르 토르발과 결혼한 노라는 세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노라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남편이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해야만 했을 때, 이미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위조해 사채업자,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던 것입니다. 그 돈으로 남편을 치료했습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런 노라의 세계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위협받게 됩니다. 노라의 남편 헬메르는 은행장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헬메르는 당시 노라가 돈을 빌렸던 고리대금업자 크로그시타를 해고시키고자 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크로그시타는 과거 노라가 자신에게 돈을 빌렸었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겠다 협박합니다. 이 평화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던 노라는 남편에게 그를 해고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지만, 사정을 알리 없는 헬메르는 이를 무시하고 그를 해고합니다. 



해고 사실을 알게 된 크로그시타는 분노하게 되고, 노라의 비밀을 폭로한 편지를 헬메르에게 보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헬메르는 역시 분노합니다. 은행장의 자리까지 얻게 된 자신을 노라가 파멸시킬 뻔했다고 소리를 치고, 당신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노라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저지른 일이었는데도 말이에요. 그 사이 크로그시타는 노라의 오래된 친구 크리스티네에게 설득당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증거, 차용증과 함께 새로운 편지를 보냅니다. 앞으로 이 사실을 가지고 협박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는 편지였어요. 이 편지를 받은 헬메르는 바로 태도를 바꿔 노라에게 다시금 사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사건은 노라에게 각성의 계기가 됩니다. 자신을 동등하게 인간으로 사랑해주었던 것이 아니라 예쁜 인형, 귀여운 애완동물에게 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노라는 더 이상 아내로도, 어머니로도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가족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이 희곡은 사랑이라는 오래되고, 절대적인 믿음에 질문을 던집니다. 가부장제는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습니다. 이런 가부장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 가족과 부부라는 믿음, 사랑이라는 믿음은 분명 큰 역할을 해냈을 거예요. 사랑이라는 말은 쉽게 사용되지만, 동시에 아주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폭력이나 희생, 학대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들에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버린다면 그 폭력의 순간은 희석됩니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과거까지도,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존재했던 체벌의 도구에 사랑의 매라는 이름을 붙이곤 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이 희곡에서 헬메르는 자신이 노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처 받은 노라가 자신의 곁을 떠나며 당신은 나를 같은 인간으로서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도. 헬메르는 노라의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그래서 어떻게 노라를 붙잡아야 할지도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노라 역시 긴 시간 자신이 헬메르를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했으며, 헬메르를 위해 범법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헬메르가 보여준 사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노라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해친다고 생각하자마자, 그는 노라를 버릴 생각부터 했으니까요. 



노라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성애는 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존재하는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믿음 중에 하나입니다. 아직까지도 자식이 있는 가정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떠나는 여성은 매우 비정하게 이야기됩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처럼 이야기되기도 해요. 그런 사회의 관점에서 노라의 선택은 충격적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예전의 그 시대에, 노라는 자신의 세 아이를 모두 남겨두고 돌아가 새로운 출발을 할 것이라고 다짐해요. 사회는 여자가 혼자 제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쉽게 허락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요.



헬메르는 노라를 이름으로 잘 부르지 않습니다. “작은 종달새”, “다람쥐”와 같은 이름으로 부릅니다. 헬메르는 은 노라를 분명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배운, 남성이 여성에게 베푸는 사랑이었을 테니까요. 그 사실에 질려버린 노라가 떠난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 부인으로의 모습을 노라에게 강요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베푸는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여성이 자신을 거부한다는 사실에 당황합니다. 애초에 그는 단 한 번도 노라를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은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존재하는 여성이 자신의 명예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을 위해 헌신할 때에만 그 조건이 성립하니까요. 헬메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명예를 희생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노라는 그 말에 수십만 명의 여자가 그렇게 했다고 대꾸합니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랑은 대체로 헌신적이며, 희생적입니다. 작품이 쓰이고 난 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사회에서도요. 이 사회에 뿌리 박혀 있는 사랑에 대한 믿음과 환상을 의심할 수 있을 때에, 여성들은 비로소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랑은 어떤 믿음 위에 세워져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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