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사는 인생 행복하게 살 순 없는 걸까?
많은 사람들에게 묻는다. "네 꿈이 뭐니?"
그들은 말한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학교를 다니며 남들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보니 취업은 녹록지 않고, 애써 들어간 회사는 나와 맞지 않는 것 같고 이제 와서 새로운 일을 도전하자니 혹시 실패할까 두렵다.
그들에게 묻는다 앞으로 뭘 하고 싶냐고, 그들은 말한다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른다고.
꿈, 그리고 현실
17살,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많은 꿈이 있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승무원이 되고 싶었으며, 호텔리어도 되고 싶었고, 선생님이 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가 끝나고 야자, 과외, 학원을 오가는 반복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꿈은 뒷전이고 오히려 공부에 흥미를 잃기까지 했다. 마침내 수능이 끝나고 나는 그나마 평소 관심이 있었던 일본어학과에 지원하게 되었다.
졸업이 가까워질 때까지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몰랐다. 졸업 후 면세점에 취업했고, 운이 좋아 괜찮은 브랜드에 정직원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하루하루 정말 열심히 배웠다. 무서운 상사 덕에 매일 집에 가서 울면서도, 으레 회사란 그런 것이려니 생각하며 버텼다. 하지만 언젠가부턴 퇴근 후에 친구들을 만나는 횟수가 줄고 집에 돌아와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거나, 주말에도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TV를 보기만 했다.
사람과 일에 치여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해졌다. 의욕도 없고 그냥 하루하루 챗바퀴를 돌리는 것처럼 자고 일어나서 일을 다녀오고, 그렇게 시간만 흘렀다.
엄마는 꽤 모든 것에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혹여 자식이 잘못될까 항상 노심초사하곤 했다.
그런 엄마에게 맏딸인 내가 "나 외국에 가서 살아보고 싶어"라는 말을 처음 꺼냈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여행을 자주 가면 돼. 그러다 보면 살고 싶은 마음은 잊힐 거야."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여행을 자주 가도 마음속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만약 이렇게 매일 일과 집을 오가는 반복적인 일만 하며 평생을 살면 과연 행복할까?
10년 뒤, 20년 뒤에 정말 나는 내 삶에 만족할까? 만약 내가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으면? 이게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일까?' 그렇게 25살, 그렇게 어리지도 많지도 않은 20대의 가장 꽃다운 나이에 나는 내 인생의 가장 큰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안정적인 직장 ? 꿈을 향한 도전 ?
해외를 가기 위한 준비는 쉽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변의 시선이었다.
직장 동료, 선배, 친구들, 친척까지 정말 많은 주변 사람들의 수 많은 조언이 쏟아졌다.
"내 친구의 친구가 호주에 갔었는데 영어도 못 배우고 돌아와서 다시 면세점에 왔대, 무슨 시간낭비니 그게~"
"힘들게 얻은 직장 그만두고 외국에 갔다가 돌아와서 취직도 못하고 나이만 먹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
독하게 마음을 먹었지만 조언을 들을 때마다 흔들리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 한 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내가 입사한 회사는 꽤 큰 기업이기도 하고 회사 복지도 좋았는데, 내가 만약 돌아왔을 때 다시 취업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다시 돌아와서 다른 일을 찾자니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수없이 마음을 다잡고 귀를 막고 차근차근 혼자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얼마나 오래 고민하고 결정한 것인지 알기에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지만 걱정을 얼마나 하고 계실지 모를 수가 없었다.
여러 나라 중 가장 빨리 비자를 받을 수 있는 호주로 가기로 했다. 시드니를 가겠다고 결정을 한 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하고 어학원도 3개월 끊었다. 꽤 큰돈이었지만 영어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내게 꼭 필요한 선택이었다. 7일의 백패커 4인실 예약을 하고 시드니 지도를 구석구석 미리 살펴보고, 버스와 지하철에 대한 정보, 기본적으로 필요한 영어까지 적어두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웠다.
설레고 즐거워해도 모자란 마당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과 걱정만 앞섰다.
두려운 마음만 가득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외국에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당당하게 시드니 공항에 첫 발을 내디뎠지만, 온갖 걱정에 휩싸였다. 백패커에서 낯선 사람들과 한방에서 지내는 것도 처음이고 공용 화장실을 이용해 샤워를 해야 했고, 허술해 보이는 락커에 온갖 짐을 넣어 잠가두고도 혹여나 누가 훔쳐갈까 걱정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과 지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영어로 된 사이트를 뒤져 연락을 했다.
종이에 미리 영어를 적어두고, 방을 구하는 중인데 한번 보러 가도 되니?라고 물어보기를 몇 차례.
한 곳에서 굉장히 친절해 보이는 주인이 집을 보러 와도 되고, 만약 네가 우리 집으로 바로 들어오게 되면 내 짐도 다 차로 옮겨주겠다고 했다. 바보 같게도 너무 쉽게 그러겠다고 하고, 시드니에 온 지 3일 만에 집을 구한 자신을 대견해하며 집주인을 기다렸다.
사기? 인생의 쓴 맛
처음 시드니에서 구한 집은 터키인이 오너로 있는 집으로, 다운타운 한가운데에 있는 럭셔리해 보이는 빌딩이었다. 차에 내 짐을 싣고 집 주차장까지 온 그 집주인은 그곳에 다다르자마자 본색을 드러내며, 3개월치 집값을 미리 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네가 알아서 나가라고 말했다.
시드니에 온 지 얼마 안돼 지리도 잘 모를뿐더러 아는 사람도 없고, 또 백패커 환불까지 받은 마당에 갈 곳이 없어진다는 것은 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가져온 현금을 모두 꺼내 그에게 3개월치 집값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셰어 메이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필리핀, 일본, 베트남, 몽골 그리고 한국 이렇게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지만 서로 배려하려는 마음 덕분에 큰 불편함이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가능했나 싶지만, 정말 좁은 방 하나에 2층 침대 두 개가 기역자 모양으로 놓여있고, 일층 침대 하나가 그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방 안에 화장실이 하나 있었는데, 여자 다섯 이서 화장실 하나를 나눠 쓰다니, 지금 생각해도 악몽 같은 일이다.
호주의 셰어하우스는 대부분, 모든 빌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그런데 5인이 방 한 개를 나눠 쓰는데도 웬만한 집보다 비쌌던 이 집에서는 우리에게 전기세와 수도세까지 내라고 했다. 이 집의 주인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미 3개월의 방세를 낸 나와 친구들은 약속된 기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의 횡포에도, 영어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나에게 그곳에서 만난 셰어 메이트들은 행운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일본인 친구 덕분에 일본인 오너가 있는 레스토랑에서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시급도 웬만한 한인식당들과는 비교할 수 없게 높았다. 그 당시 한인 식당들은 악덕 사장들이 많아 캐시로 한 시간에 8불~11불을 주는 곳이 많았는데 일본인 사장은 14불 정도의 금액을 주었다.
또한 베트남 친구는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 곳에 나를 데려가곤 했는데, 덕분에 다양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내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배우다
한국에서 부모님 집에 머무르며, 부모님이 해주신 따뜻한 밥을 먹으며 편하게 지내던 행복한 시절은 끝났다.
새벽에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학교나 일에 지각을 하게 된다. 아침에 1시간이 넘게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다른 셰어 메이트 때문이다. 음식을 사 먹기만 하면 생활비가 부족해지기 때문에, 직접 음식도 해야 한다. 빨래를 해주는 사람도 없다. 청소를 해주는 사람도 없으며, 아파도 혼자 아파해야 한다.
해외에 나와보고 나서야,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편하게 지내왔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