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현실 사이의 줄다리기
1. 회전교차로
세종시엔 유독 회전교차로가 많다. 이론적으로 회전교차로는 사고를 줄여주고 교통흐름을 더 원활하게 한다. 요새 신도시 위주로 회전교차로 설치가 늘고 있단다.
문제는 회전교차로 룰에 익숙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규정 상 교차로에 먼저 진입한 차에게 항상 우선권이 있다. 진입을 원하는 차가 아무리 오래 기다렸어도 회전차량이 있으면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 반대로 교차로에 진입한 차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진입 대기 중인 차가 아무리 많아도 회전차량은 양보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양보한다고 서는 게 더 위험하다.
그런데 회전 차량이 있든 말든 상관없이 그냥 밀고 들어오는 차들이 있다. 그렇게 들어오면 회전하던 차가 눈치껏 멈춰서는 수밖에 없다. '이게 규정'이라며 냅다 들이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진입 대기 차가 좀 기다렸다 싶으면 회전차량이 친절히 양보해주는 경우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뒤따라가다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가 종종 있다.
룰을 아는/지키는 사람과 룰을 모르는/안 지키는 사람이 섞여있으니 오히려 더 문제가 생긴다. 지키는 사람은 지키는 사람대로 짜증이 나고, 안 지키는 사람은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내면서도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 영국에서 처음 운전 시작할 때 이 회전교차로(roundabout) 룰을 익히는 게 오른쪽에서 운전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으니 사람들의 실수도 이해는 간다. 이 상태면 다 같이 익숙한 신호등 체계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2. 거리두기 완화
요새 코로나19 방역을 보면서 비슷한 느낌이 든다. 이상적인 정책(회전교차로)을 시행하기 위한 준비(규정 숙지)가 안 되어 있으면 효과도 안 나고 전환도 늦다.
코로나19의 '종식'까지 아주 오랜 기간이 걸리거나 애초에 퇴치가 불가능하다면 장기전에 맞는 대응이 필요하다. 지난해부터 계속 '지속 가능한 방역', '균형 방역'을 부르짖었던 이유다. 각 조치의 효과와 비용, 수용성, 준비 수준을 고려해 현실적인 거리두기 방안을 마려해야 했다. 감염 규모를 통제한다는 목표 하에 방치되는 기본권 침해도 시정이 필요했다. 처음보다야 나아졌지만 여전히 우리 대응은 지속불가능한 비상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백신을 맞기 시작하면 전환이 더 수월해질 줄 알았다. 고위험군이 백신을 맞아 감염이 줄고 중증-사망도 줄어 확진자 수에 집중할 여지가 적어진다. 하지만 우리 대응은 오히려 반대였다. 확진자수가 좀 늘자 최고 단계의 거리두기 시행이라는 역행이 일어났다. 그 빌미를 제공한 게 '백신 맞으면 끝'이라는 안일한 인식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확진자 수를 줄이는 게 여전히 중요한 과제임은 부인할 수 없다. 실제 위험이 커서가 아니라 위험에 대한 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현재 대응체계는 확진자 급증 시 의료진과 방역 인력에 가해지는 부하가 엄청나다. 감염의 사회적, 정신적 비용도 여전히 큰 편이다. 이 상태로 '사망 위험은 줄었다'며 느슨하게 대응하면 의료적, 사회경제적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회전차량 우선'이 맞는 규정이라고 해서 진입하는 차를 들이받아버릴 수 없듯, 균형 방역이 이상적이라고 해서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방역을 완화할 수 없다. '백신 도입과 접종'에만 집중한 나머지 완화를 위한 단계적 이행은 거의 논의되지 않은 점이 안타깝지만 만시지탄이다.
3. 지금이라도 준비해야
하지만 안전하고 효율적인 회전교차로를 제대로 못 쓰는 상황은 낭비가 너무 크다. 더 많은 사람이 규정을 익혀 회전교차로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게 바꿔가야 한다. 회전교차로만 지어놓고 알아서 지키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교육하고 위반자를 단속하여 정책의 수용성을 늘여야 한다.
코로나19 방역도 백신 접종만 완료된다고 어느 순간 갑자기 전환이 되는 게 아니다. 백신 접종이 오히려 '방역 완화'의 충분조건으로 인식되어 이후 유행 규모를 통제불가능한 수준으로 키울 수도 있다.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코로나와 함께 사는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수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우리가 코로나19 유행을 억누르기 위해 사용했던 여러 수단- 공포, 낙인, 희생 강요, 국가주의 - 들이 전환을 어렵게 하는 역설이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삶에 서서히 적응해가겠지만, 그 과정에서의 피해와 혼란을 줄이기 위한 대비가 필요하다.
백신 접종은 더 빠르게, 완화(및 완화 신호)는 신중하게, 그리고 패러다임 전환 준비는 치밀하게, 이번 유행을 마지막 위기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