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대 심야마트, 세인즈버리 로컬
결혼생활 중 신혼 때만큼 다툼이 잦을까. 서른 해 넘도록 다른 삶을 살아온 남녀가 어느 날 갑자기 공통의 라이프스타일을 구축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결혼과 동시에 해외로 건너가 매일 같이 IKEA 가구를 조립하며, 소꿉장난하듯 가정을 일구어야 했던 내게는 모든 것이 두 배, 세 배 버거웠다. 어떤 날은 남편 퇴근 무렵까지 저녁식사를 준비해놓지 않아서, 또 어떤 날은 서로 간에 문자에 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통의 신혼부부들이 그러하듯 우리 또한 소모적인 말다툼을 주고받으며 감정에 생채기를 냈다.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직장도, 가족도 등진 채 먼 영국 땅까지 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늦은 밤 마트를 기웃거리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다.
다투고 나면 집을 나가는 쪽은 늘 나였다. 처음에는 성난 코뿔소처럼 씩씩대며 가방에 여권과 노트북을 쑤셔 넣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났으나, 집을 나가는 횟수가 늘어나며 부질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어차피 싸움의 끝은 화해였으니까. 라면물처럼 펄펄 끓어오른 감정의 발화를 잠시 식혀낼 곳이 필요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맨발을 운동화에 쑤셔 넣은 채 맨 손으로 집을 나서고 있었다. 그 뻔한 종착지를 알면서도 스스로를 밤거리로 내몬 데에는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던 어리석은 젊음 탓일 거다.
밤 9시 옥스퍼드의 밤거리. 상가들이 밀집한 헤딩턴 Headington 사거리까지 10분가량을 터벅터벅 걷는다. 처음에야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어디냐" 걱정스레 묻는 남편의 전화도 걸려왔지만, 상습적인 가출이 되고나서부터는 휴대폰마저 침묵했다. 인적 드문 밤거리는 뭉크의 <절규> 속 배경처럼 온통 까맣고 고요했다. 외투 주머니 속에서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조금만 참을 걸 왜 나왔을까' 슬쩍 후회가 일지만, 발길을 돌리기에는 아직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불을 밝히는 곳이라곤 주요소와 펍, 11시까지 영업하는 편의점이 전부였다. 그나마 안전한, 동양인 여성이 홀로 꽤 긴 시간 서성여도 괜찮을 세인즈버리 마트를 선택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큼지막한 오렌지색 로고가 신뢰감을 주는 세인즈버리 Sainsbury's에 들어서면 우리네 동네 편의점 같은 작은 마트가 그렇게 아늑할 수 없었다. 그 시간쯤이면 보안문 옆으로 몸집 큰 경비원이 서 있곤 했는데, 종종 노숙자나 취객이 거리에서 고성방가를 할지라도 안심할 수 있어 그 존재가 위안이 되곤 했다. Every day 7am to 11pm이라는 슬로건은 초록빛 스타벅스 로고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어쨌거나 밤 11시까지, 적어도 이곳에선 안전하겠지. 나는 몇 줄 되지 않는 진열대를 훑으며 어지러운 마음을 다독인다. 세인즈버리는 영국의 슈퍼마켓 체인 가운데 두 번째로 규모가 큰데, 도시 곳곳에 늦은 밤까지 영업하는 편의점 형태의 세인즈버리 로컬 Sainsbury's Local을 운영한다. 2015년 기준 영국 슈퍼마켓 시장의 16.9%를 차지할 만큼 장악력이 엄청나다.
세인즈버리 로컬에는 특별한 품목이랄 게 없다. 그저 모든 것이 조금씩 비싸다는 것뿐. 그렇지만 여기서 쇼핑을 멈춰서는 안 된다. 영어에 큰 뜻을 품고 어학연수를 떠나온 만학도처럼, 이 근처 어딘가 작은 스튜디오 에 거주하는 대학생처럼, 좀 전의 가정불화를 들키지 않기 위해 꾸역꾸역 물건을 집어 들고 정성스레 내용물을 살핀다. 곧장 데워 먹을 수 있는 차디찬 파스타 샐러드, 내일 아침 식사로 먹어야 할 것 같은 콘프레이크 시리얼, 액티비아 요구르트와 이노센트 주스도 기웃거린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들어간 마켓에서 점점 쇼핑에 집중하는 나를 발견한다. 어느 순간 식료품 매대를 거쳐 도착한 곳은 카운터 근처의 주류 코너. 기숙사 친구들과 파티를 계획하는 여대생처럼, 술이 고갈되어 잠시 추가로 몇 병 사러 나온 싱글처럼 마음에 드는 와인 라벨을 눈으로 따라간다. 오이스터 베이와 켄달 젝슨, 가성비 좋은 4.99파운드짜리 카바 Cava를 훑어다가 보면 어느 순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와인을 마신 것도 아니면서, 보기만 해도 스르륵 취해버리는 이 감정이란. 물건에 집중하다 보면, 목적 없던 쇼핑에 소비가 따르고, 물건을 구입하는 순간 이제는 그것들과 함께 돌아가야 할 목적지가 생기고는 한다. 늘 세인즈버리 로컬 밤쇼핑의 끝에는 흰 봉지 속에 달랑달랑 미적지근한 화이트 와인 한 병이 들려있고는 했다.
Sorry. Excuse me.
진열대 사이를 지나가는 늦은 밤 세인즈버리 로컬의 사람들의 표정은 메마르고 건조하다. 타인을 의식할 시간도 물건을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도 없다. 심야업무를 마친 노동자, 늦은 밤까지 파티를 즐기고 귀가하는 젊은이들과 내일의 아침식사를 부지런히 준비하는 외국인 어학생들이 오고 가는 공간. 그리고 자주색 세인즈버리 유니폼을 입은 성실한 점원들 사이에 내가 있다. 그 속에 있는 것이 사치 같아, 나는 어느 순간 남편과 무슨 연유로 다툼을 했는지, 그 싸움의 발화 같은 것은 한순간 잊어버리고 어서 따뜻하고 포근한 내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이 미적지근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냉장고에 넣고 내일은 차갑게 한 병 마셔야지,라는 생각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