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수도는?
6개월 간의 빅토리아 살이를 마치고 온 도시 토론토.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의 수도로 착각할 정도로(수도는 오타와) 토론토는 캐나다의 최대 도시입니다. 그만큼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각자의 모습으로 모자이크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이 곳. 첫인상은 꽤나 강렬했습니다. 도시는 활기찼고 어느 곳이든 사람들로 인산인해입니다. 빅토리아에서는 듣기 힘들었던 클랙슨 소리도 이 곳에서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들렸고, 이 곳 저곳에서 사람들의 싸우는 소리도 들렸죠. 눈과 귀가 쉴 틈이 없는, 마치 우리나라의 서울을 온 듯한 느낌이 드는 이 곳에서의 앞으로가 기대됐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엄청난 불안과 초조가 요동쳤습니다.
한국에서 캐나다로 처음 올 때 보다 더 적은 돈으로 토론토에서의 첫 시작을 성공적으로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가득했기 때문이죠. 집을 구하기 전 지낼 호스텔을 미리 예약해 두었는데 그 기간 동안 알맞은 위치에, 합리적인 가격의 집을 구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새 직장도 구해야 했고요. 모든 게 또다시 처음이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차곡차곡 쌓아 놓았던 성이 단단한 벽돌 성이 아닌 모래성이었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 느낌도 들었어요.
생각보다 토론토는 너무 큰 도시였고 다운타운에 꽤 괜찮은 집의 ‘방 하나’를 렌트하려면 한 달에 100만 원은 훌쩍 넘는 렌트비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때 생각했죠.
‘욕심이 너무 과했나?’
1년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자 했던 제 목표가 ‘욕심’으로 느껴졌습니다. 사실 욕심이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욕심입니다. 그래서 더 이루고 싶었어요. 보란 듯이 해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하루 종일 집을 알아봤고, 6개월 전에 했던 그대로 집주인과 메일을 수도 없이 주고받았습니다. 뷰잉(viewing) 약속을 잡고 오전엔 서쪽으로, 오후엔 동쪽으로 토론토 이 곳 저곳을 헤집고 다녔어요.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가격이 괜찮으면 위치가 별로였고, 위치가 괜찮으면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으니까요. 게다가 토론토엔 현지인들도 가기를 피하는 우범지역들도 몇 군데 있기 때문에 그런 지역을 하나하나 체크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길 4일. 호스텔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로비에 앉아 방을 알아봤습니다. 오늘 구하지 못하면 호스텔에 예정보다 더 머물러야 했기에 눈에 불을 켜고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한 곳.
‘모든 가구 IKEA 새것, 월세 유틸리티 포함'
사진 상으로는 아주 깔끔해 보였어요. 위치도 다운타운 서쪽 끝이어서 조금 우긴다면 다운타운에 산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죠. 당장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오늘 방을 볼 수 있냐고 말이죠. 다행히 답이 빨리 왔습니다. 서로 시간을 맞춰 약속 시간을 정한 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호스텔을 나섰습니다.
‘이번에 뭔가 느낌이 괜찮은데?’
다운타운에서 버스로 20여분 걸려 도착한 집. 버스정류장과도 가깝고 주변엔 공원, 학교, 식료품점 등이 있어 일단 위치는 합격. 주인아주머니께 도착했다고 연락하자 1층으로 내려와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러시안 아주머니가 러시아 특유의 강한 엑센트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간단히 서로를 소개한 후 2층으로 올라가 방을 봤는데 제 마음속에선 이미 계약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은 비싼 월세였지만 집은 깨끗했고 광고대로 모든 가구는 새 것이었어요. 게다가 침대 매트리스까지 새로 바꿔 준다는 말에 마음속으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기에 몇 분 정도 이곳저곳을 살펴본 뒤 결국 “계약할게요.”라고 결의 있게 말했죠.
방 청소를 하고 있던 주인아주머니는 “진짜 계약할 거야? 지금 바로 입금하면 뒤에 오기로 약속돼있는 사람들 취소할게. 확실해?”라고 말하며 고무장갑을 벗어 계약서를 꺼내 보였습니다. 캐나다에서 쓰는 세 번째 계약서. 처음엔 아무 의심 없이 서명하고 순식간에 계약을 끝냈던 저는 그새 달라져 있었습니다. 계약 내용 1번부터 마지막까지 잘 모르는 어려운 단어는 사전을 찾아가며 정확한 뜻을 찾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하나하나 질문했습니다. 몇 번을 훑어본 후 저와 주인아주머니는 서명란에 나란히 서명했고, 드디어 저의 진정한 ‘토론토 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보증금 개념으로 첫 달과 마지막 달 월세를 한꺼번에 내야 하는 조건이었기에 통장은 순식간에 가벼워졌지만, 호스텔로 돌아오는 제 발걸음은 그보다 더 가벼웠습니다. 호스텔 로비에서 그동안 함께 각자 살 집을 찾던 멕시코, 브라질, 호주 친구들도 제 계약 소식을 듣고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러고는 “방 사진은 있어?”, “위치는 어디야?”, “월세는 얼마야?” 와 같은 질문을 속사포로 던져댔습니다. 그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며 스스로 무엇인가 이룬 것 같았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말이죠. 하지만 그 순간은 세상을 다 얻는 기분이었기에 즐기고 싶었어요. ‘그다음 걱정은 그때 하자!’라는 정답을 내린 후 어느 때 보다 홀가분한 호스텔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23kg짜리 캐리어 두 개와 터질 것 같은 백팩 하나를 짊어진 채 새로운 보금자리로 향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1층 현관을 들어서 제 방 문을 열려고 하는데,
‘철컥’
‘?’
이게 무슨 일일까요. 분명히 주인아주머니가 미리 주신 키로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지가 않습니다. 열쇠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문을 열어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맞지 않는 열쇠로 아무리 해 봤자 열리지 않기는 매 한 가지. 주인아주머니께 상황을 설명하자 1시간 내로 가겠다며 미안하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려 정말 1시간 여 만에 주인아주머니는 오셨고, 열쇠가 바뀐 것 같다며 원래 열쇠를 주셨습니다. ‘우여곡절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 인가, 멀지 않은 거리를 이렇게 힘들게 올 줄이야.’라는 생각과 함께 방에 드디어 ‘입성’했습니다. 하루 종일 두 개의 캐리어와 씨름해서 인지 몸은 녹초였고,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러길 한 시간여. 꿀 같은 낮잠을 뒤로한 채 가방에 꾹꾹 눌러 담았던 옷가지들을 꺼내 차곡차곡 다시 정리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입고 왔던 두툼한 패딩, 혹시나 이곳에서 운동하지 않을까 싶어 챙겨 왔던 운동용 장갑, 빅토리아에서 일할 때 신었던 검은 운동화까지. 모든 물건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추운 2월의 어느 겨울날, 태어나서 처음 와본 도시에서의 매섭고 외로운 겨울을 견뎌준 패딩. 결국 6개월 동안 한 번도 끼지 않은 미안한 장갑. 그리고 닳을 대로 닳은 검은 운동화. 그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제 머릿속을 스쳤고, 어느덧 짐 정리는 뒷전이었습니다.
‘그때는 참 힘들었는데, 지금 와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그 이야기들을 하나 둘 서랍 속으로 정리할 때 느꼈던 감정은 오묘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새롭게 쓰일 이야기들이 기대됐고 궁금했어요. 어떤 곳에서 일하게 될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또 어떤 새로운 추억이 만들어질지 아무것도 모르기에 더 기대됐던 토론토 ‘내 집’에서의 첫날밤은 그러게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잘해보자 토론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