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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진 Jun 03. 2020

마지막 준비

그래도,결국 오는

뭐든 익숙해 질만 하면 끝이 다가오는 법이다.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던 일터도 어느덧 익숙해지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도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어갈 때쯤 나는 캐나다에서의 마지막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지난해 2월이 끝나갈 무렵 아직 추운 겨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빅토리아에서 시작한 캐나다살이가 새로운 2월을 맞이하며 토론토에서 끝이 나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내가 예상하고 계획한 그대로 이루어진 건 없었지만, 오히려 그 계획대로 착착 되지 않아 더 재미있었던 1년.



우리들은 남을 위로할 때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라는 말을 가끔 하곤 한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무책임한 말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긴 한다. 오늘 아무리 힘든 일이 있었고, 억울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눈 딱 감고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면 기적과도 같은 새로운 내일이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내일을 ‘오늘’로 받아들이고 산다. 그렇게 자의든 타의든 시간은 우리의 어제를 덮어준다.



빅토리아 햄버거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패티를 굽고 감자를 튀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릴에서 굵은 기름 한 방울이 내 엄지손가락 쪽 손등에 튀었다. 평소에도 자주 있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번 기름은 다른 때보다 더 크고, 더 뜨거웠다. 아니나 다를까. 손등에는 물집이 생겼고 며칠 동안 화상 크림을 발라도 쉽게 낫지 않았다. 매일 손에 물을 묻혀야 하는 일터에서 일하는 나에게 그 물집은 어느 상처보다 아팠고, 쓰렸다.



토론토 카페에서 일할 때였다.

큰 도시 한가운데 섬처럼 둥둥 떠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는 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고 차가운 도시 사람들의 말과 눈길에 쉽게 상처받았다. 이날도 그런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한껏 긴장한 날. 무슨 일이든 지나치게 긴장하면 무리 없이 잘하던 일도 잘 풀리지 않는다. 나이 지긋한 백인 남자가 주문하는데 전혀 알아듣지를 못했다. 잘 못 들었다고 되묻는 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을 되물으니 손님의 얼굴은 화로 가득했고, 보다 못한 수퍼바이저가 대신 주문을 받고 나더러 잠시 쉬고 오라 했다. 내 자신감은 바닥을 쳤고 어디든 숨고 싶었다. 하지만 쉬는 시간 15분이 지나고 나는 다시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또 긴장해야만 했다.



빅토리아에서도, 토론토에서도 그 두 날은 참 힘들었다. 뜨거운 기름이 손등에 튀었던 그 순간도 힘들었고, 당연히 이해했어야 할 손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순간도 힘들었다. 집에 돌아온 후엔 남의 나라에 와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한국이었다면 약국이나 병원에 들러 간단히 진료받고 약사서 바르면 금방 나을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 며칠을 끙끙댔다. 한국이었다면 손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머리가 하얘지는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때를 다시 돌아보니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모든 것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가 친구들과 맥주 한잔하며 풀어놓을 여러 에피소드 중 하나. 좋든 싫든 시간이 해결해 준 것이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걸 몸소 경험 한 것이다. 앞으로도 시간이 해결해 줄 수십 수백 개의 에피소드들이 켜켜이 쌓인 캐나다에서의 1년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어떤 순간은 인생에 다시 있을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고, 또 어떤 순간은 다시는 입 밖으로 꺼내기 싫을 만큼 부끄러운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슬픈 순간, 화난 순간, 외로운 순간, 수많은 순간들이 모인 나의 1년이 끝나가고 있고, 나는 이곳에서의 익숙함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내가 살던 집, 일하던 직장, 자주 가던 식당, 카페, 자주 타던 버스, 지하철. 모든 익숙함이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이 순간, ‘내가 잘살아왔나?’라는 불안 섞인 질문이 머리를 가득 메울 때 다시 한번 무책임 하지만 절대 깨지지 않는 법칙과도 같은 말을 되뇌어 본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지금 느끼는 이 불안함도, 외로움도, 슬픔도 모두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라고.

그리고 좋은 첫인상보다 어려운 좋은 마지막 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동료들이나 룸메이트들에게도 그렇고 나 스스로에게도, 이곳에서의 마지막이 아름답길 바란다.

쉽진 않겠지만 여러 친구의 도움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살아냈고, 마냥 즐겁지만도 않았지만, 앞으로의 인생에 이렇게 행복한 순간을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1년의 마지막을 나는 그렇게 준비하고 있다.





Instagram : @victor_yong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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