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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Dec 21. 2022

괜찮다면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인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한 아이가 곁에 다가와 구두를 닦겠냐고 묻기에 괜찮다고 답했다.

 나는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앞쪽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에 아이는 몰래 내 왼쪽 발에 똥을 묻히고 다시 나에게 물었다.

 신발을 닦겠냐고.

 깜짝 놀라며 신발에 묻은 오물을 보고 주변을 살피고 다시 그의 얼굴을 보니 그 눈동자와 표정에서 그가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이의 눈은 크고 속눈썹은 길어서 마치 소와 같았다.

 짧은 머리에 짙은 눈썹, 얇은 입술 끝에 매달린 짓궂음, 심술과 기대가 공존하는 눈동자.

 젖살이 빠지지 않은 통통한 두 볼은 붉었지만 피부가 검은 탓에 붉은 게 맞는지 다 살필 겨를은 없었다.

 길고 가녀린 팔다리까지 일견 한 뒤 나는 다시 괜찮다고 답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토라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돌아섰다.

 다른 곳으로 향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상황의 유쾌함과 황당함과 조금의 통쾌함이 섞인 웃음을 뱉었다.

 고어텍스다 이놈아. 기분이 불쾌하진 않았다.

 길가에 버려진 종이로 가볍게 닦아내고 가던 길을 간다.

 인도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다.




 영국과 아이슬란드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잊고 있던 풍요로움을 찾고 그것이 익숙해질 때쯤 떠나야 한단 생각을 했고 다시 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다음 여행지를 고민했고 우연히 선택한 책 속에서 인도에 대한 글을 읽고 인도 여행을 결심했다.

 소유를 주장할 것이 없는 땅에서 내면의 모든 것을 비움으로 인해 다시 채울 생각이다.


 인도로 떠나면서 괜찮다면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먼지가 부유하는 땅을 지나며 틈날 때마다 메모하고, 하루를 마칠 때면 그날의 메모를 모아서 편지를 썼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다.

 런던에서 한동안 사람들 틈에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전까진 나만 볼 글을 메모장에 써왔기 때문에 글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기록'의 용도에 머물렀는데 타인이 읽을 것을 생각하니 '전달'해야 하는 것으로 많은 것이 달랐다.

 그것이 즐거웠다.

 글 쓸 생각을 하는 탓인지 내면으로부터 다양한 상념이 끝없이 솟았고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까지 눈에 담고 손으로 썼다.

 하루의 경험과 상념을 모은 글을 갈무리하면 늦은 저녁이었고, 글을 메일에 옮겨 보내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

 자정을 훌쩍 넘어 잠들기 일쑤였으나 피곤하진 않았다.

 편지에 적은 글자 수만큼 나는 발가벗었지만 내 안의 것이 밖으로 뱉어진 기분이 좋았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전체를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내가 하는 일부의 말과 그가 본 단편의 행동으로 내 삶과 선택이 재단받는 것을 꺼려했지만 이제 내가 글로 쓰는 만큼 전달되는 것이 즐겁다.

 재단받을 수 없는 여행지의 일상을 적는 탓인지, 썼다 지우며 충분히 정제하는 탓인지 내 마음이 편안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루 끝에 완성된 글은 일기인지 편지인지 수필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타인에게 보내는 글인지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인지도 판별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구태어 구분하며 편지를 쓰지 않았고 하루의 경험과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썼다.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이었으나 인도에서 하루는 유독 길었고 편지를 보내는 날들이 이어질수록 몸과 마음은 가벼워졌다.

 밖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나를 가볍게 한다면 꽤 많은 글을 쓰고 싶었다.




 아침엔 여유 있게 샤워를 즐기다가 기차 시간에 쫓겼습니다.

 지도를 보며 무작정 역으로 달려가다가 시간 내 도착이 불가능할 것을 직감하고 릭샤를 잡아 탔습니다.

 아무렴 3륜 차가 뛰는 것보다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틈이 없어 보이는 도로에 틈을 만들어 주파한 릭샤 운전사는 시간 내 기차역에 도착하는 듯했으나 기차역을 얼마 안 남기고 갑자기 주유소로 들어갔습니다.

 황당한 상황에 다급히 기차 시간이 다됐다며 세네 번을 재촉하고서야 그의 핸들을 다시 도로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왜 주유소로 향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그에게 루피를 건네주고 곧장 내달려 기차 플랫폼을 통과한 후 서로 다른 네 명에게 자이푸르행이 맞는지 확인하고 간신히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배정된 기차 칸인 G8쪽에 가보니 과연 탑승객 명단 중에 내 이름이 있습니다.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기차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하고 싶은 욕구가 들자 작은 수첩이 그리워졌습니다.

 몇 개월 전, 독일 드레스덴의 유스호스텔을 프랑스에서 온 여행자와 둘이서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유레일 패스를 끊어서 3개월째 여행 중이라는 이 친구는 작은 수첩과 펜을 몸에 붙여 두고서 쉴 틈 없이 메모했습니다.

 그가 소개한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드레스덴을 걷는 동안에도 그의 기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히 집착에 가까울 정도였고 기록이 그 정도로 모이면 그 자체로 하나의 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드레스덴은 선이 굵은 도시였고 도시만큼 인상 깊은 친구였습니다.

 다른 여행자들도 수첩을 꺼내어 뭔가를 적고 있습니다.

 나는 핸드폰이나 노트북으로 떠오른 생각을 적습니다.

 핸드폰으로 기록하는 것이 짐을 줄이고 기록 유실도 줄일 수 있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아날로그 적인 행위가 부럽습니다.

 그의 작은 수첩은 글씨로 빼곡했고 손 떼 뭍은 장들은 정겨웠습니다.

 핸드폰의 공간이 훨씬 방대하고 자유롭지만 행위의 연속성은 그 메모장을 넘을 수 없을 듯했습니다.


 기차 창밖은 끝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땅과 가난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철로 옆과 길 위에 가만히 서있거나 걷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판자로 지은 집은 간신히 보금자리가 됐습니다.

 도시에서 가까운 쪽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왠지 아찔하여 눈을 감았습니다.

 기차가 철로를 따라가는 동안 느껴지는 일정한 진동과 소리에 졸음이 몰려와 그대로 잠을 청했지만 오래되지 않아 눈을 떴습니다.

 저 멀리 다른 칸에서부터 간식을 파는 이들이 소리를 치며 다가왔고 그것을 유심히 보다가 보온 통을 들고 짜이를 외치는 사람을 불러 한잔을 청했습니다.

 종이컵에 담긴 인도식 밀크티의 진한 향과 맛이 코와 목을 타고 넘어갑니다.

 짜이는 저마다 방식으로 만드는데 사내의 것은 생강 맛이 유독 강했습니다.

 생강의 매운맛이 달콤함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콧김을 뿜었습니다.

 한잔을 더 하고 싶었으나 이미 사내는 멀리 지나간 뒤라서 빈 종이컵을 매만지며 다음 사람을 기다립니다.




 입안에 남은 짜이 향이 까끌거리는 동안 어떤 생각의 연결고리 없이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작은 키에 희고 복슬거리는 머리.

 귀여운 동글이 안경을 착용한 탓인지 모든 것이 둥글고 인자한 모습으로 기억한다.

 할머니는 막내인 내게 다가와서 몰래 간식을 주시거나 용돈을 주시곤 하셨다.

 형제들 중에 막내인 아버지, 그리고 그 형제들의 2세 중 막내인 나를 애잖아 하셨던 것 같다.

 그때는 애잔하다는 말도, 눈빛에 담기는 감정도 알지 못했다.

 기차 경적소리가 세상을 집어삼키던 조곡동의 비탈길을 달려 올라가 문을 열면 앉아있던 할머니, 철길 넘어 작은 밭을 일구던 할머니.

 이따금 할머니가 생각날 때면 먼저 떠올리는 기억들이다.

 그리고 요양 병원에 계시던 것을 생각한다.

 할머니는 망각의 시간을 거슬러 어린아이가 됐고 율무차를 참 좋아하셨다.

 언젠가 방문했을 때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보호사 분에게 모아 온 돈을 한 움큼 드리며 율무차를 원 없이 드실 수 있도록 부탁했다.


 오래전 할머니는 엄마 곁에서 나라는 핏덩어리를 안았다.

 할머니의 애잔한 마음은 이 작은 아기를 볼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아빠는 일을 하기 위해 타지로 가야 했고, 광주에 혼자 남은 엄마와 나를 돌보기 위해 할머니는 순천에서 광주로 왔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몸이 약한 엄마와 옹알이하는 나를 품었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다섯 남매를 홀로 키우며 그들이 각자의 가정을 일구는 동안 할머니는 늘 가장이었고 가장 큰 울타리였다.


 할머니가 요양원에 계시는 동안 엄마는 매주 순천으로 내려갔다.

 순천에 다녀오면 할머니 상태는 어떤지 이야기했고 우리는 들었다.

 자판기에서 율무차 한잔을 뽑으면 그것을 소중히 쥐고 호호 불며 마시는 모습이 어린아이와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모습을 상상했다.

 주마다 광주에서 순천을 오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엄마는 그렇게 했다.

 그것은 아빠를 위한 애잔한 마음이고, 동시에 그녀 스스로의 마음이기도 했을 것이다.

 외할머니도 치매를 앓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항상 따스하고 현명하다.

 할머니는 아빠의 엄마의 나의 엄마였다.

 나는 그 모습을 몇 번 뵙지 못했다.

 그때 그렇게라도 할머니를 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다.

 헤어짐은 갑작스러웠고, 아득한 슬픔이었고, 붙잡을 수 없는 허망함이었다.

 

 기억을 떠올리자 문득 슬퍼졌다.

 이건 기차 안에서 마신 짜이 때문이다.

 짜이가 율무차를 떠올리게 해서다.


 자이푸르로 가는 길에 유채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유채꽃이 아니더라도 그와 흡사한 노란 무언가다.

 봄노래를 찾아들었다.

 겨울의 시기에 여름의 기온을 가진 나라에서 아직은 먼 봄을 그린다.

 우리는 늘 꽃피는 봄날을 기리고 기다렸지만 되돌아보면 그때가 봄날이었다.

 

 자이푸르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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