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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식 Aug 30. 2019

[A-4] 흔들리는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다양한 변종들, 우리의 선택은?

[4] 흔들리는 자본주의


미국식 자본주의를 카지노 자본주의 또는 카우보이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되는, 경쟁지상주의의 경제체제가 카우보이 자본주의다. 승자독식이다. 극단적인 자유방임의 경제체제다.


미셸 알베르에 따르면, 미국의 자본주의는 온갖 모험과 아슬아슬한 재미와, 강자 중심의 스릴 넘치는 서부극과 닮았다. 상어, 독수리, 사자, 악어 등 온갖 맹수들이 벌이는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정글에서의 싸움과 같은 매우 거친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한 방에 거대한 부를 이뤄내는 성공담에 있어서도 라인형의 차분하고 안정적인 사회와는 다른 별개의 매력이 있다.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안정된 인생이 보장되겠지만, 그 반면에 인생은 아마도 단조롭고 지루할 것이다(자본주의 대 자본주의, 소학사, 1993).


이익 추구를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경제지상주의는 대한민국에서도 거의 매일 목격된다. 어떤 파렴치한 짓을 하더라도 승자가 되고 보자는 방식은, 일단 승자가 되고 나면 모든 과오가 덮어지고, 모든 걸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것을 용인해 온 결과를, 우리는 지금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언론방송과 정치인들의 극단적인 행태를 보면서 실감할 수 있다.


자본주의 세계가 보여주는 부의 불평등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주의’란 책에서 보여주었듯이, 자본주의를 자유방임의 상태로 놓아두면, 부의 불평등 상태가 점점 심각해진다. 피케티의 책을 읽기 보다는 이준구 교수의 서평을 읽으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운데, 피케티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발전해 온 긴 역사에서 평균적인 자본수익률이 항상 경제성장률보다 높았고, 그래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왔다고 한다. 이런 추세를 방치하면, 미래의 사회에서는 자본소득의 비율이 점점 높아질 것이고(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그에 따라 세습자본이 굳건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과는 무관하게,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한 개인의 향후 경제적 성패를 결정짓게 된다는 것이다(피케티는 암울한 미래를 전망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이 미래가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현실이 된 것 같기도 하다).

1810~2010 유럽과 미국의 부의 불평등;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주의'에서

필립 코틀러(마케팅의 대가 코틀러가 자본주의를 고쳐 쓰자고 한다! 다른 자본주의, 더난출판사, 2015)도 지적했듯이, 상품과 서비스를 충분히 구매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진 소비자에 기반을 둔 경제시스템이 자본주의인데, 중산층이 붕괴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되는 현재의 시스템은 자본주의 자체를 위해서도 백해무익하다. 그런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계속 유지될 수 없다.


코틀러는, 상위 1%의 소득이 하위 50%의 소득보다 더 많다면, 이는 자본주의 자체에도 위협이 된다고 한다(도덕적으로도 문제이지만, 경제적으로도 문제다).


위의 도표(부의 불평등 추이)를 보면, 4개의 지표 모두 계속 상승세(불평등 심화)를 보이다가 1910년부터 1950년까지 하락하고, 다시 대략 1980년경부터 상승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흰 삼각형과 사각형이 있는 선)를 아래 도표와 함께 살펴보자.

미국의 최고 한계소득세율: 1914~2016

놀랍게도 미국의 최고 (한계)소득세율이 1932년부터 레이건이 집권한 1981년까지 60% 이상이었다(우리나라도 신군부가 집권한 1980년 이전에는 최고 (한계)소득세율이 70%였다). 게다가 1951년부터 1963년까지는 '최고' (한계) 소득세율이 무려 91%였다(각 과세구간 별로 정해진 한계소득세율을 곱한 후 합산한 금액이 최종 소득세액이 된다).  1942년부터 1954년까지는 과세구간이 24단계였으니, 참으로 촘촘하게 과세한 것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미국의 전후 5,60년대는 경제적으로 황금시대였다. 이 시기는 고성장의 시대였으며, 동시에 고세율의 시대였고, 그리고 고평등의 시대였다. 위 두 자료를 비교해보면 소득세율의 변화와 부의 불평등 추이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율이 높았던 시기에는 불평등이 감소되었다.


그래서 201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교수는, 소득세율을 미리 규정된 불평등 척도에 연동시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불평등이 심화되면 소득세율이 자동적으로 올라가고, 불평등이 완화되면 소득세율이 자동적으로 내려간다.


자본주의를 고쳐 쓰려는 시도들


자본주의란 자본가가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재를 사용하여, 임금노동자를 고용하고 이를 사용해 이윤을 목적으로 상품을 만드는 경제체제를 말한다.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이, 자본주의는 경제를 성장시키고, 기술혁신을 일으키고, 효율성을 높이는 데 있어서는 탁월한 제도이다. 인류에게 가장 많은 풍요를 가져다 준 제도가 자본주의 아니던가.


그동안 체제 경쟁을 해 온 대한민국과 북한, 그리고 서독과 동독을 보더라도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가 공산주의보다는 우월하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 이렇게 풍요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특히 젊은 청년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헬조선을 벗어나고 싶다고 청년들은 몸부림을 친다. 흙수저를 뱉어 버리고 싶은 욕지기와 갑질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가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 그리고 이 생에서는 틀렸다고들 말한다. 그러면 다음 생에서는 가능할까?


국제구호기구인 Oxfarm의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에 세계 최고 부자 85명이 가진 재산이 하위(가난한) 35억 명보다 많았는데, 2019년 보고서에는 세계 최고 부자 26명의 재산이 하위 38억명이 가진 재산과 비슷해 졌다. 그리고 2017년에 새롭게 발생한 부의 82%가 상위 1%의 차지가 된 반면에, 하위 50%의 부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부의 불평등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Oxfarm의 불평등 보고서

미국의 경우이지만, 2011년에 최고의 헤지펀드 매니저인 레이 달리오, 칼 아이칸, 제임스 시몬스가 받은 연봉이 각각 39억 달러, 25억 달러, 그리고 21억 달러였다고 한다. 평균적인 직장인의 연봉을 넉넉하게 10만 달러로 잡고, 30년을 일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평균적인 직장인이 이번 생은 포기하고, 다음 생에서 칼 아이칸의 ‘1년치 급여’ 만큼 벌기 위해서는 대략 830번을 더 태어나서 꼬박 벌어야 된다.


그러니 이번 생을 포기하고 다음 생을 기약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이번 생에서 이런 불평등한 상황을 바꾸는데 힘을 쏟아보자. 그래도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의 자본주의는 미국과 같은 약탈적 자본주의를 하고 있지는 않다.


아래 자료는 2015년 기획재정부 자료다. 지니계수가 1이면 완전 불평등 상태를 말한다(즉, 오직 이 그 나라의 부를 모두 독차지한 상태). 지니계수가 0에 가까울수록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국가는 국민이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과세하고(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소득에 많이 과세), 저소득층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의 소득재분배 정책을 편다. 이런 정책 전후의 ‘소득지니계수’를 비교하면(사실 벌어들이는 소득에 대해서가 아니라, 보유하고 있는 금융자산과 부동산에 대한 지니계수도 봐야 한다), 그 나라가 소득불평등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두 손 놓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고루 잘 살도록 노력하고 있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소득재분배 정책을 통해 소득의 지니계수가 개선된 비율이 한국은 10% 정도다. 이는 독일의 42%, OECD 평균인 34%보다 훨씬 낮고, 심지어 미국의 23%보다도 낮은 수치다. 아직은 시장소득의 지니계수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은데, 문제는 절대치가 아니라, 정부가 소득재분배 정책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있다. 미국 사회의 부의 불평등도가 얼마나 심한지를 위에서 살펴 보았는데, 우리나라는 미국보다도 소득재분배 정책이 더 미흡하다.  

지니계수 개선율; 기획재정부 자료, 2015

우리의 선택은?


어느 하나가 완전히 나쁘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옳다고 하는 건 옳은 자세도 아니고, 현실에서 가능하지도 않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노사관계를 보고, 현재 진행 중인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신문방송의 보도와 정치가의 행태를 보면 참으로 답답한데, 제대로 된 판단과 선택을 위해서는 양 쪽을 균형있게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자본주의 변종을 얘기하고 있다. 존 매키(홀 푸드 마켓 CEO)는 '깨어있는 자본주의(conscious capitalism)'를 얘기하고, 라젠드라 시소디어는 자본주의의 꽃인 기업을 좀 더 사랑받는 기업으로 만들자고 한다. 로버트 라이시도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 자본주의를 고쳐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부와 힘의 상향 분배를 끝내고, 새로운 경제규칙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기업을 재구성하기 위해 독일의 공동결정제도를 참고하자고도 한다.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돈에 대한 사랑보다는 '좋은 삶'에 대해 방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필립 코틀러도 더 나은 자본주의를 위해 현재의 자본주의가 가진 한계와 단점의 해결을 촉구한다.


일단 왼쪽 끝에 라인형 자본주의를 위치시키고, 오른쪽 끝에 카지노 자본주의를 위치시킨 다음, 그 사이 어딘가를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피케티가 지적했듯이, 소득세와 상속증여세의 누진성을 강화해야 하고, 자본에 대한 과세에도 누진성을 적용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처럼 조세정책이 소득불평등을 전혀 시정하고 있지 못하다면,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머지않아 갈등과 파멸의 나락으로 빠질 것이다. 경제적 기득권층들이 지금과 같은 우월한 지위를 계속 누리고자 원한다면, 최소한 이 사회가 붕괴하지 않고 유지되도록 양보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더 나은 자본주의'를 위해서는, 경제학자 박종현 교수나 로버트 프랭크 교수가 말하듯이, 시장에서의 결과가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이 아닌 운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존중되는 능력의 내용을, 무자비한 카지노 자본주의의 시장판을 휘저었던 극단적 이익추구, 성공에의 질주, 무한경쟁에서의 생존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인간에 대한 존중, 그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 불이익이 예상되더라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같은 덕성으로 채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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