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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식 Oct 15. 2019

마지막 수업에서 들은 '자전거 인생'의 교훈

고등학교 마지막 수업의 회상기

마지막 수업에서 들은 ‘자전거 인생’의 교훈


“여러분들은 대학에 진학할 것이고, 또 몇 년 후면 직장을 갖게 되어 사회에 나가게 됩니다. 오늘이 아마 이 학교에서 여러분을 보는 마지막 시간겠네요.”


평소 다른 선생님들과 구별되는 행동과 말로 우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국어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시간이었다.  ‘누가 라이터 가지고 있나?’고 물으면 눈치빠른 누군가는 재빨리 나가 화장실 구석에 숨겨놓은 라이터를 갖다 드렸다. 가끔씩 우리를 성인 대접해 주는 듯한 그런 멘트에 우리는 감격해 했고, 그는 그런 것으로 우리들의 호감을 샀다. 그는 담임도 맡지 않았고, 이른 오후에 유유히 교정을 가로질러 퇴근하는 모습도 몇 번 목격되었기에, 우리는 그 배경에 대해 ‘상당한 실력’을 가졌기에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지레짐작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평준화 이전에 지역의 명문고에서 국어를 가르쳤고, 국어 과목에서는 우리가 살던 부산(그때는 직할시로 불렸다)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선생님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다른 고교의 상위권 학생들이 이 선생님으로부터 고액 과외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었.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게 되면 자전거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 자전거를 탈 때 어떻게 하죠? 머리는 굽히고, 발로는 페달을 힘껏 밟아야 되죠? 그렇습니다. 윗사람에게는 머리와 허리를 한껏 굽히고, 아랫사람들을 있는 힘껏 밟아야 여러분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페달을 밟아야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는다.” 혹은 “다리로는 페달을 밟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손과 눈을 잘 움직여야 자전거가 목적대로 나가게 된다.” 정도의 말을 기대했던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걸까?


그 후 대학에 진학했고, 독일로 유학을 갔다. 다른 친구들이 사회 초년병으로 회사에 적응하고, 새로운 인생의 시기를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을 동안, 나는 독일에서 혼자 지냈고, 자주 외로움을 느꼈으며,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지나간 추억들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기억에 없는데? 황 선생이 그런 말을 했다고?” 다들 그런 기억이 없다고 했다. 이십 여년만에 귀국해 고등학교 친구들과 몇 번 어울린 끝에 그때의 자전거 인생 이야기를 물어 보았지만 아무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내가 잘못 들었을까? 그렇게 젠틀하고 인기 많던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을리가 만무하지. 그렇지. 그럴꺼야.


나는 내 기억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소위 문제 학생이었다. 당시 한 반 뿐이었던 문과반에 들어갔지만, 성적은 전체 72명(그땐 그랬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물론 뒤에서!). 내 중학교 성적을 알고 있던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이제는 공부에 집중하라고 특별반에 배치해 주었는데, 결국 나는 적응하지 못했고, 고등학교의 마지막 1년도 여전히 방황하면서 헛되이 보내 버렸다. 수업도 자주 빠졌고, 수업 때 집중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다른 친구들의 기억에 없는 학교 때 이야기를 내가 감히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틀림없이 그렇게 들었는데...


독일에서 석사 학위를 마친 후, 나는 독일 회사에 취직을 했다. (박사)학위 과정을 마칠 때까지 공부를 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그 당시 독일은 이미 주 5일 근무를 하던 때였고, 칼퇴근이 보장되었으며, 법적으로 최소 15일 이상의 유급휴가가 보장되었기에, 나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전해 들었던, 한국 직장에서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비교해 보면 여기서는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복병을 만났다. 내가 다녔던 회계컨설팅 회사는 당시 Big Five 중 하나였고, 내가 속한 부서는 한국 대기업의 독일현지법인주요 클라이언트로 가지고 있었다. 당시는 IMF 전이었고, 회사들은 흥청망청 돈을 쓸 때였다.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을 새벽을 넘기며 술접대하고 접대 받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내 박사과정은 시버스 리걸과 가라오케 속에서 속절없이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 - 궁정동 안가에서 마셨다던 그 양주가 당시 유행이었다.

어쨌든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 자주 ‘자전거 인생’을 떠 올렸다. 정말 실감났다. 독일도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이 모이는 직장에서는 이런 저런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인사관리 강의 때 들었던 뼈 있는 농담이 생각났다. ‘수녀원에서 중도 하차하는 분들의 주된 이유가 종교 문제일까요? 인간관계 때문에 중도 하차하는 비율이 더 높습니다.’ (회사에서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이 짐작보다 훨씬 심하다는 것을 농담으로 한 것이니 수녀님들께서는 부디 오해하지 마시기를!)


내가 거쳐 갔던 회사들에는 마키아벨리의 문하생들이 수두룩 했다. 아침 출근할 때 간과 쓸개를 집에 놔두고 온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 듯 했다. 그나마 능력이라도 없으면, 쓰나미에 쓸려 가듯 흔적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실력을 쌓기 위해 이런 저런 공부를 했다. 저들은 도대체 어디서 저런 신공들을 익혔을까? 저들도 고등학교 마지막 수업 때 자전거 인생을 살라는 은밀한 가르침을 받고 그걸 진작에 실천해 온 것일까?


성공해야 한다? 시절 우리들이 집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들었던 얘기는 일관되게 '인생에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다. 세뇌 되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독교 신자로 이루어진 축구팀이 기억난다. 골을 넣고 나면 운동장에 꿇어 앉아 매번 감사의 기도를 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신이 있다면 곤혹스럽겠다고 생각했다. 패한 팀에 기독교 신자가 있을 텐데... 신이 일개 축구경기에까지 임해서 나의 승리에 축복을 내렸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건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 아닐까?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고, 실패하는 사람 다수일 것이다. 한 집단에서, 한 조직에서 꼭 나만이 승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상식을 뒤엎는 무리하고 무례하고 자의적 발상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투르 드 프랑스' 경기의 3,000 km 이상에 달하는 전 구간을 머리를 박고, 페달을 짓밟으며 전속력으로 달릴 수만은 없다는 것을. 그건 가능하지도 않고, 그래서는 결승점에 도달할 수도 없다. 그건 마치 끊임없는 스트레스 속에서 교감신경계가 지배적인 상태로 생활하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긴급상황에서만 반응하여 생명을 구하는 역할을 맡은 교감신경계가 일상적으로 우리 몸을 지배한다면, 우리는 늘 피곤에 찌든 생활을 하게 되고, 머지않아 탈진상태(burn-out)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인생에서 성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성공만을 위해' 전 인생에 걸쳐 전력 질주하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레드(모건 프리먼)가 버스 속에서 되뇌이던 독백이 떠 오른다. "나는 결말이 불확실한 긴 여행을 떠나는 자유인이다." 우리 모두 인생의 결말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 못하므로, 섣불리 하나의 패에 몰빵을 하는 것은 신중치 못한 처사가 될 확률이 높다. 

영화 쇼생크 탈출

나는 다른 상상을 한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당시의 선생님들은 모두 (사범)대학을 나온 분들이다. 그 옛날에 대학을 나왔다는 것은 나름대로 금수저 출신이고, 학업 성적도 뛰어났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당시 교사라는 직업이 그리 대우받던 시절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모두가 부러워하는 교직이 아니었던 시기에, 나름 수재로 성장했을 선생님들은 대부분 좌절의 시기를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 나라의 경제도, 기업도 고속성장을 거듭하던 시절, 나보다 못났던(?) 고향 친구들은 회사에 취직해서 교사의 몇 배나 되는 연봉을 받으며, 자가용을 사고, 아파트를 구입한다.


황 선생님의 '자전거 인생'은 그런 회한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그처럼 지적인 선생이 어린 학생들을 앞에 두고 자전거 인생을 운운할 정도로 그는 좌절하고 있지 않았을까? 7,80년대 고속성장의 뒤켠에서 주역이 되지 못한 어린 시절의 수재가 느꼈을 열패감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내 기억이 정확할 것이라고 믿는다. 황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에서 자전거 인생을 명히 얘기했다. 친구들이 새로운 인생의 시기(취업, 연애, 결혼)에 몰입해 있는 동안, 나는 타국에서 혼자 지난 시간을 씹고 또 곱씹었으니까. 다시 황 선생님을 만나면 여쭙고 싶다. “선생님, 여전히 자전거 인생을 살라고 말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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