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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 diary Sep 04. 2020

여름의 끝자락.

하루일기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을 때가 종종 있다. 2020년은 모두에게 그런 한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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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봄의 따스한 기운을 느낄 새도 없이 코로나가 이 곳 미국에서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반짝여야 할 봄날들은 버겁고 생소한 뉴노멀(New normal)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느라 분주하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여름은 시작되었고, 6월, 나는 여름의 시작과 함께 회사에서 팀을 옮기게 되었다. 새 계절, 새 팀, 새 동료들, 새 기분,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이어서 다시 회사에 입사하는 기분이었던 6월. 적응하느라 분주했고, 빨리 익숙해지고 싶어 마음이 조급하기도 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았는데,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분주했고 바빴다.

비단 마음만 바쁜 게 아니라, 새로 옮긴 팀은 정말 많이 바빴다. 뭐가 그렇게 할게 많은지 해내야 하는 task list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고,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버겁다 보니 가뜩이나 분주하고 둥둥 뜨는 마음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되어 버렸고, 나는 앞만 보고 일했다. 앞만 보게 되니 주변이 눈에 돌아오지 않는다. 일과 삶의 경계는 어느 순간서부터 무너져있었고, 나름의 생활수칙이 있었던 내 삶의 한 부분도 조금씩 무너져가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몸은 지쳐갔고, 즐겁고 다채로워야 할 주말은 지친 몸을 충전하느라 정신없었다. 가뜩이나 단조로운 shelter in place 생활은 더욱더 건조해져 갔다. 그렇게 무엇 때문인지도 모를 만큼 분주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다 고개를 들어보니 9월이다. 가을이 온 것이다. 웬일이람... 허망하고, 허무하다 해야 하나. 나의 지난 3달은 '집에서의 근무'가 아닌 '근무지에서 숙식'하는 기분으로 일과 나의 생활을 구분시키지 못했으며, 나 스스로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미안했다.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있었을 줄이야. 나를 잃어가는 기분이 들게 하기까지 왜 그렇게 나는 정주행만 했었어야 했을까. 수많은 생각과 질문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 내 안을 왔다 갔다 한다 —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나는 행복한가? 오늘의 삶으로 내가 바라는 앞으로의 10년을 투영할 수 있는가? 나는 계속해서 힘을 낼 수 있을까? 나는 잘 해내고 있나? 내 능력이 부족하진 않은가? — 딱히 답은 없다. 하지만 어쩌면 내 안에서 스스로 답을 알 것도 같은 이 질문들을 쭈욱 나열해봐야 잠이 드는 3개월이었다. 더 이상 버틸힘이 없었다. 쉬어야 했고 멈추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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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 4일, 근교라고 하기엔 조금은 거리가 있는 Lake Tahoe를 다녀왔다.

아쉽게도 얼마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산불 영향으로 타호는 선명하고 쨍한 아름다운 뷰를 보여주진 않았지만, 물은 시원하게 맑았고, 푸른 나무들은 높고 곧게 솟아있었다. 내가 잠시 쉬어 가기에 타호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테트리스 블록처럼 쌓여있던 캘린더의 미팅 블록 대신 바다 같은 호수 보며 멍 때리는 순간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도 해야 할 일이 딱히 없을 때의 자유로움이 너무 짜릿했고, 위에 열거해놓은 질문들을 다시 한번 곱씹고 그려보며 나를 다독여주는 4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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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 — 이 조용한 휴식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일터 아닌 일터인 내 책상 앞으로 출근해 카메라 앞에서 나를 보이고, 주어진 미팅을 하고, 또 바쁘게 지낼 생각을 하니, 이 지나가는 시간이 더디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타호 호수를 마주하고 멍 때리면서 곰곰이 생각한 건데, 내가 보낸 3개월의 시간처럼은 못 지낼 것 같다. 최선을 다한 하루하루였지만, 나에게 더 이상 미안하고 싶지 않다. 분명 알게 모르게 성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장보다 더 중요한 건 나를 지켜주는 일인 것 같다. 좀 덜 신경 써도 되고, 좀 느슨해져도 되고, 좀 더 여유로워져도 좋겠다. 어차피 나는 이러나 저러나 계속 갈 건데 굳이 뛸 필요는 없으니까. 지치지 않으려면 천천히 걸어가보자 — 그 길이 경사진 길이든, 내리막 길이든, 평지이든, 앞으로 꾸준히 가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니까.  


2020년 9월 3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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