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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Apr 14. 2021

하지 마?

9시가 되자마자 대학 동기 J가 사내 메신저로 대화를 걸어왔다. 대화창에 적힌 메시지는 단 세 글자. 


하지 마.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대체 뭘 하지 말라는 거지?' '이건 견주가 반려견에게 하는 소리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지난 2년 간의 경험으로 나는 알고 있었다. J는 간밤에 아내에게 혼쭐이 난 게 분명했다. 둘의 부부싸움은 싸움이라기보다 일방적인 훈육에 가까웠다. J의 아내는 불만이 임계점에 이르면 한 번씩 불호령을 했고, J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J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몇 번의 싸움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곧이곧대로 했을 때 어떤 참사가 벌어지는지 확인한 후로 그는 더 큰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 참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밤새 냉가슴을 앓다가 출근하면 으레 하는 말이 "하지 마"였다. 결혼 생활이 이렇듯 고단하니 너는 나와 같은 꼴을 면하려면 결혼을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J만 그런 게 아니었다. 대학 동기들과 만나는 자리는 무슨 이야기로 시작되더라도 끝은 "하지 마"로 귀결되는 깔때기 토크였다. 동기들 가운데 기혼자의 비율이 8할을 넘어가며 2할 남짓의 미혼자들은 그들이 계몽시켜야 할 대상이 되었다. 죽음과 결혼은 늦을수록 좋다. 27년 옥살이를 견딘 넬슨 만델라도 이혼을 했다. 소크라테스는 아내 때문에 철학자가 되었다더라. 비혼 주의자도 결혼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때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어쩌고저쩌고.


하루는 그게 진심인지 의문스러워서 물어보았다. 결혼을 후회하냐고. 그랬더니 그건 아니라고 힘들 때도 있지만 좋을 때도 있다고 했다. 이놈의 자식들은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여자애 괴롭히던 꼬꼬마에서 전혀 발전이 없었다. 남초 집단이 애초에 표현에 서투르고 말을 좀 더 위악적으로 하기는 한다지만, 결혼생활 좋다고 하면 누가 팔불출이라고 놀릴까 봐 그러나. 놀리면 좀 어때. 부러워서 그럴 텐데. 대체 왜 결혼생활의 좋은 점은 숨기고 나쁜 점만 말하는 것일까?


"왜 좋은 점은 이야기 안 해?"

"다 그런 게 있어. 너는 결혼 안 해봐서 몰라. 그냥 니가 부럽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너는 결혼 안 해본 적 없어서 몰라"


그렇게 몇 차례 랠리 끝에 다다른 합의는 "결혼은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라는 것이었다. 친구들로부터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도 마냥 속 편하고 자유롭지만은 않다는 걸 인정받은 후에야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졌다. 그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면 어쩌라는 거야? 인생의 갈림길에서 양비론에 이르면 우리의 정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그래. 인생은 고통이다. 짠.


결혼은 한 사람의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비단 기혼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결혼은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 결혼을 할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에 따라 지출 계획이 달라질 수 있고, 연애 관계에서 입장차도 발생한다. 사회에서 혼인 적령기라고 부르는 시기의 성인남녀에게 상대방과 결혼 가능성은 연애를 시작하거나 끝내는 데 중대한 요인이다. 사회적인 시선에 있어서도 그렇다. 과거보다 미혼과 비혼에 대한 우리 사회의 수용성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정상가족과 혼인 적령기에 대한 압박감은 상당하다. 결혼 그까이꺼 안 하면 좋지 하고 대충 치워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 말이다. 


하루는 친구들의 부부동반 모임에 출장 MC 명분으로 참석했다. 회비를 냈는데 빠지긴 억울했다. 같은 회비를 내고 혼자만 와서 어떡하냐는 질문에 이게 싱글세냐고. 억울하니까 2인분 먹어야겠다고 한껏 명랑한 척을 하고 있었다. 자리가 길어지며 화두는 결혼과 육아를 돌고 돌아 유일한 솔로인 내 근황으로 향했다. 


"창희 씨는 결혼 얘기 없어요?"

"헤어졌대"

"어머 정말? 왜? 이번엔 정말 잘 맞는 것 같더니"

"이 자식은 글러 먹었어. 생각이 많아서 결혼하기 힘들어"

"왜요? 무슨 일인데요 창희 씨"

"쟤가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 뜯어말리더라고요. 결혼하면 후회한다고"


그렇게 한 가정에 폭탄을 집어던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가 별 뜻 없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생각이 많아서 결혼하기 힘들다라... 정말 내가 생각이 그렇게 많은가? 그렇다고 결혼처럼 중요한 일을 막 저지를 수도 없잖아? 아닌가? 결혼도 일단 저지르고 감당하면서 살 일인가? 꼬리를 무는 의문이 이어졌다. 생각에 잠겨 걷다가 문득 얼마 전 한 소설에서 보았던 구절이 떠올랐다.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이승우, 사랑의 생애 中)


친구가 한 말은 고까웠는데 작가가 한 말이라니까 납득이 되는 것도 같았다. 정작 실행에 옮기는 것은 없고 부질없는 고민만 더하고 있었던 걸까? 작가님의 팩트 폭력에 가격을 당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훑어보았다. 쓸쓸해지면 버릇처럼 하는 일이었다.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에는 아이들이 제법 많아졌다. 남의 자식은 금방 나이 먹는다고 어떤 친구의 아이는 벌써 초등학생이었다. 언제 이렇게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건지. 


내가 이러쿵저러쿵 고민하는 동안 다들 나름의 답을 쓰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갈등 앞에 침묵을 선택한 J도, 결혼하지 말라고 뜯어말리는 친구들도 모두 자신의 결혼생활이 있다.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한심할 수 없었던 친구도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어 타인의 삶을 일부분 짊어지고 있다. 내 부모님과 부모의 부모님과 그 부모님이 그랬듯이. 


"아니, 언제는 하지 말라며"


누구라도 탓해야 할 것 같아서 혼잣말을 뱉어내고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마저 훑어 내려갔다. 한 때 웨딩 사진으로 뒤덮였다가, 이제는 아이들의 사진으로 바뀌어 있는 그 목록이 마치 계절에 따라 세상의 모습이 바뀌는 것 같았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잎이 무성하고, 또 열매가 맺히는 자연의 순환처럼 거대한 순리가 느껴졌다. 딱히 연락할 곳도 없어서 휴대폰을 속주머니에 집어넣고 옷깃을 여몄다. 옷차림이 어쩐지 계절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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