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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May 13. 2021

나의 갑자원

배정받은 고등학교를 처음 확인했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동성고? 어지간한 학교면 적어도 이름은 들어봤을 텐데,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라 1차 당황. 선생님한테 이 학교 대체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실업계라고 하셔서 2차 당황. 부모님께 동성고라고 얘기하니까 부모님도 거기가 어디냐고 되물어보셔서 몹시 당황. 그러게요. 여기가 어딜까요? 수소문 끝에 광주상고가 2년 전에 인문계 고교로 전환된 곳이 동성고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는 언짢은 마음들이 일순간 싹 사라졌다. 거기엔 꽤 잘하는 야구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에 푹 빠져 있었다. 세기말을 전후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며 일본 만화들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나는 다름 아닌 야구만화에 꽂혀버렸다. H2와 터치를 읽게 된 건 일종의 사고였다. 해리포터를 읽고 부엉이를 기다리던 애들처럼 나는 그게 정말 고교야구의 모습인 줄 알았다. 고등학교 야구부에는 선후배 간의 동료애로 똘똘 뭉쳐서 갑자원*의 꿈을 꾸는 애들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동경했다. 내가 야구부를 가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곧 갈 고등학교에 야구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들떴을 정도였으니.


* 갑자원 : 일본 관서지방 효고현의 한 지역. 이 곳의 야구장에서는 매해 봄과 여름 두 차례에 걸쳐 고교야구 전국대회의 본선이 치러지는데, 이 곳 구장과 본선대회를 별칭으로 '갑자원'이라고 부른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초기에 한자식 독음을 장려하면서 우리나라에는 주로 갑자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어 독음으로는 고시엔.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는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서 야구부가 연습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정말 만화에서 보던 것처럼 펑고도 하고, 송구와 베이스 커버, 배팅 같은 동작들을 연습하고 있었다. 몸을 쓰는 데 익숙한 애들이 모여서 간결하고 효율적인 동작을 반복하는 모습은 묘한 쾌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쾌감이 오래가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흥이 나지 않고,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처음엔 그게 아다치 미츠루 만화에 꼭 등장하는 소꿉친구(예쁨)나 매니저(예쁨)가 없기 때문인 줄 알았다. 이래서 남고는 안 된다며 무고한 교육과정을 비판했었지만, 정작 진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야구부는 운동을 꽤 힘들게 했다. 선발 후보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운동장에서 보냈다. 여름에 창문을 열어두면 배트에 공이 맞는 소리, 기합 소리는 물론이고 포수 미트에 공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렸다. 하루 내내 흙바닥을 구르며 치고 뛰고, 던지고 받는 기본 훈련을 반복했다. 선생님들은 꾸뻑꾸뻑 조는 학생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준답시고, 저렇게 뙤약볕에 운동하는 애들 중에 90%는 프로에 가지도 못하고 어중이떠중이가 된다고, 너네는 공부하길 잘한 거라고 얘기해주었다. 운동장 쪽에서 실려오는 공기만으로도 숨 막힐 것처럼 뜨거운 날이었다. 바람에 실린 흙먼지와 땀냄새가 텁텁했다. 야자 시간에는 타이어 때리는 소리가 빈 운동장을 울렸다.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인 날이면 타격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야구부가 '빠따'를 맞는 소리였다. 8톤 트레일러에 끼우는 두꺼운 타이어를 때리는 소리보다 고등학생의 대퇴부를 때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이고 있는 무게도 후자가 전자보다 가벼울 리 없었다. 야구부는 프로라는 좁은 문을 놓고 일찌감치 인생을 올인했고, 그만큼 치열하게 운동했다.


장래에 대한 걱정 없이 오로지 고시엔을 꿈꾸는 건 일본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엘리트 체육인 양성이 목표인 우리나라와 다르게, 일본에서는 클럽활동으로 야구를 했다. 학업과 병행하며 방과 후나 방학을 이용해서 야구부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걔네들 중에서 프로를 지망하는 것은 일부이고, 대부분은 졸업 이후 각자의 진로로 나아가며 사회인 야구단 활동을 한다. 일본의 야구소년들이 도모다찌들과의 스바라시 한 꿈을 꿀 수 있었던 건 다 그게 취미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니던 3년은 마침 우리 학교 야구부의 전성기였다. 한기주와 양현종이라는 두 유망주가 한 학년 터울로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야구가 투수놀음이라면 고교야구야 말로 투수의 놀이터였다. 고교야구는 프로리그와 달리 단기간의 토너먼트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걸출한 에이스가 연달아 등판해가며 우승까지도 노릴 수 있었다. 결승전에는 전교생이 전세 버스를 타고 동대문 구장까지 응원을 가곤 했다. 고교야구의 성지라고 불리던 그곳에서 마지막 남은 고교야구에 대한 일말의 환상까지 모두 털어버릴 수 있었다. 


한기주와 양현종. 두 사람 중 더 유망했던 건 한기주 선수 쪽이었다. 그는 입학할 때부터 시속 150km가 넘는 공을 던지는 역대급 재능러였다. 1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줄곧 선발을 맡았는데, 해가 다르게 성장하는 고등학생들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 한기주 선수의 활약에 힘입어 우리 학교는 고교야구 4대 메이저 대회 중 황금사자기를 제외한 청룡기, 봉황대기, 대통령배에서 우승을 했다. 선수 본인도 1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계약금을 받고 프로구단에 입단했다. 고졸 신인의 계약금 10억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그 사이에 월드콘 가격이 두 배가 넘게 올랐는데 말이다.


양현종 선수는 화려한 선배의 후광에 가려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다른 고등학교였다면 일찌감치 에이스가 될 수 있을 재목이었지만 선배가 잘할수록 그의 출전 기회는 줄어들었다. 빛이 쨍할수록 그림자도 또렷한 법이었다. 야구부원들에게 전국대회는 증명의 기회였다. 프로무대를 밟기 위해서라도 이 곳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줘야 했다. 그런 동대문 구장까지 와서 벤치를 지켜야 했던 양현종 선수의 마음은 어땠을까? 선발로 출장해서 패배하는 것보다 후보로 우승하는 것이 더욱 막막하지 않았을까? 나보다 잘하는 게 상대편이라면 마음 놓고 미워라도 할 텐데, 이런 경우에는 마땅한 과녘을 찾지 못한 미움의 화살자신을 향했을 테니까. 갑자원에서는 패배하거나 선발로 뛰지 못한 선수들이 경기장의 흙을 담아가는 전통이 있다. 다시 갑자원에 돌아와서 흙을 돌려주겠다는 다짐의 의미라고 한다. 양현종 선수가 동대문 구장을 떠나며 담아간 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게 좌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는 불편해서 야구부의 연습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나는 사이 두 선수의 명암은 엇갈렸다. 양현종 선수는 한 구단의 어엿한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었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바탕으로 자신의 꿈을 위해 메이저리그에도 진출했다. 그간의 세월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몇 차례의 슬럼프를 겪었고, 뛰어난 커리어를 쌓았음에도 류현진과 김광현의 동급으로 놓기에는 포스가 부족하다며 본인의 잘못도 아닌 일로 욕을 먹기도 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도전하는 그에게 마이너리그만 전전하다 귀국할 것이라고, 대투수 대투수 하니까 진짜 본인이 대투수가 된 줄 아냐며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그가 자력으로 선발 등판을 냈다. 서른 넷이라는 운동선수로 적지 않은 나이에 결국 꿈을 이룬 것이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던 걸까?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보면서 열패감을 느끼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그때의 분한 마음을 거름 삼아 더 열심히 정진했던 걸까? 그가 동대문 구장에서 담아온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 흙을 뿌린 곳은 메이저리그의 마운드였다.  


한기주 선수에 대해서는 인터뷰가 생각보다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미약해졌고, 그나마 작년에 은퇴를 하면서 몇 곳의 지면에 심정을 남긴 게 대부분이었다. 내심 실망이 컸으리라 짐작했다. 스무 살에 커리어 하이를 찍은 이후로 줄곧 내리막에 결국엔 재기하지 못했으니, 회한, 아쉬움 같은 감정들을 마땅히 내비쳤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인터뷰 영상 속의 그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화려한 데뷔와 이후의 침체기, 온갖 욕을 들어 먹었던 베이징 올림픽, 트레이드와 은퇴까지. 불편할 수 있는 질문에 약간의 자조를 농담 삼아 섞어가며 답하는 모습에서 단단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극복해 낸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그것이었다. 호기심이 생겨서 여러 기사를 뒤져보다가 은퇴의 아쉬움을 남긴 인터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딸이 다섯 살이 되는 해까지 던지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다. 보통 다섯 살부터는 아이들이 기억을 잘할 수 있기 때문에 투수 아빠의 기억을 남겨줄 수 있는 다섯 살까지 던지기로 아내와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아쉽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지도자로서 아이들의 부상 방지를 위한 야구 교육을 하고 싶다며 말을 이어갔다. 은퇴한 프로야구 선수가 늘 하는 평범한 인터뷰였지만, 어쩐지 진실되게 느껴졌다. 범상치 않은 굴곡을 겪은 사람이 평범한 이야기를 하기까지에는 부단한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투수들은 등판 순서에 따라서 보직이 결정된다. 한 경기의 시작부터 가장 많은 이닝을 끌고 가야 하는 선발투수, 이기고 있는 경기 혹은 지고 있는 경기를 이어받는 승리조 패전조 불펜투수, 경기의 마지막을 안전하게 매듭짓는 마무리 투수. 구위와 체력, 그간의 성과에 따라 팀의 승리에 적합한 자리를 맡게 되는 것이다. 가장 빛나는 역할은 선발투수이고 그다음이 마무리 투수, 승전 조 불펜투수, 패전조 불펜투수의 순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의 평가도 물론 선발이 제일 좋을 것이고 패전조가 제일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마운드에서 자신의 공을 던진다. 투수가 공을 던져야 야구는 시작될 수 있다. 투수가 공을 던지지 않는다면 공은 어디로도 향할 수 없다. 투수의 손 끝을 떠난 공이 스트라이크가 될지 볼이 될지. 삼진이 될지. 홈런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기록들이 쌓여서 하나의 경기가 될 뿐이다.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서 야구부의 연습을 구경하던 어떤 날이 떠오른다. 발치까지 야구공이 굴러왔는데, 코치님으로 보이는 글로브를 오물거리며 공 좀 던져달라고 했다. 나는 우리 동네 3루수의 자부심을 담아 힘껏 던졌다. 사람 좋아 보이던 그 코치님은 "어깨 좋은데? 야구했으면 잘했겠다"라고 소리쳤다. 최대한 멀리 던지기 위해 투포환 하듯이 45도 각도로 던진 공이라 체공 시간이 길어서 야구에서는 쓸모없는 공이었지만, 속없던 그땐 그걸 칭찬으로 듣고 뿌듯해했다. 본격적으로 야구를 했더라면 주전도 못했을 텐데, 구경꾼이라 칭찬을 듣는 거라며. 저기 운동장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매일 같이 굴러도 코치님께 좋은 소리 한 번 듣기가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실패를 두려워하던 겁쟁이가 장년 겁쟁이로 자라날 때까지, 열패감과 실패를 견뎌낸 사람들이 각자의 마운드에서 자신의 공을 던진다. 뒤늦게 그들의 단단한 모습이 부러워진 나는 요즘 불펜에서 몸을 푸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저지르며 산다. 언젠가 나의 갑자원에 이 회한과 반성을 거름 삼아 뿌릴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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