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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May 28. 2021

프라하행 야간열차

전광판이 깜빡거리더니 열차 도착 예정시간 옆에 두 시간이 추가되었다. 또 지연된 것이었다. 처음이 세 시간이었고 이번에 두 시간이니 도합 다섯 시간. 장장 다섯 시간을 헝가리 국경의 이름 모를 간이역에서 꼼짝없이 기다리게 된 셈이었다. 역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온통 어둠뿐이었다. 변변찮은 역사조차 없었고 역무원도 없이 벤치만 달랑 놓여있는 그야말로 간이역.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도 나 밖에 없었다. 온통 무섭도록 적막한 와중에 전광판은, 그러니까 장시간 관찰한 결과 나를 향해 빈정대고 있는 게 분명했던 건방진 전광판은 느긋하게 깜빡거렸다. 왜 늦는지 설명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그저 지연된 시간만 띄워놓고 깜빡깜빡. 은근슬쩍 두 시간을 추가해놓고 깜빡깜빡. 열이 뻗쳐서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한바탕 벌일 기세로 전광판을 세우고 있는 기둥에 발길질을 하고 씩씩거렸지만 곧 다시 벤치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역 바깥으로는 불빛 하나 없는 외딴곳에서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프라하행 야간열차는 그로부터 정확히 두 시간 뒤에 도착했다. 오후 8시 탑승 예정이던 열차에 자정이 넘어서야 탑승할 수 있었다. 열차 계단에 오르며 모든 게 해결된 줄 알았지만 정작 문제는 다음 순간이었다. 검표원이 예약 티켓을 보여달라고 하는데, 아무리 뒤져보아도 티켓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야간열차는 유레일 패스와 별도로 해당 좌석의 예약 티켓을 끊어야 한다.) 당황한 나는 "분명히 예약을 했다. 여기 패스도 있다"라며 유레일 패스를 흔들어 보였지만 검표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기 왼손에 쥔 예약 티켓을 가리켰다. 이거랑 똑같은 티켓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다음 역까지 내 자리에 아무도 타지 않으면 거기가 내 자리인 것 아니냐. 그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리겠다"라고 했지만 다시 고개를 저으며 티켓을 가리킬 뿐이었다. 이 벽창호 같은 헝가리안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 거금 9유로를 주고 다시 티켓을 끊었다. 망할! 우랄! 알타이어족! 우리와 같은 어족이었지만 헝가리어에는 융통성이란 단어가 없는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지들은 맘대로 늦어놓고, 엄청 엄격하게구네" 객실로 들어서며 분통을 터트렸다.


"한국분이세요?"


욕만큼 명백하게 국적을 드러내 주는 것도 없었는지 객실 안에 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말을 걸어왔다. 한국 사람, 그것도 비슷한 나이의 여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당황하는 중에 그녀가 반색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야간열차가 이렇게 좁고 위험할 줄 몰랐다며, 한국사람이라도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내가 들어와서 다행이라고 했다. 악수를 하고 짐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녀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방학을 이용해서 여행 중이라고 했다. 왜 혼자냐고 물으니 일행들은 일정에 맞춰서 프라하로 먼저 이동했고, 자기는 부다페스트가 너무 좋아서 하루 더 남아있었던 거라고.


"대학생? 복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말 편하게 해요. 우리"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더 친근하게 말을 걸었겠지만 원래도 쾌활한 성격인 것 같았다. 통성명과 함께 스물셋이라고 내 소개를 먼저 했다. 그녀는 자신이 누나라고 대답하더니 왼손 두 손가락과 다섯 손가락을 차례로 내 쪽으로 펴 보이고 가방을 뒤적거렸다. 종이컵을 먼저 꺼내 입에 물고 가방 한 구석에서 보드카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종이컵 하나를 내 쪽으로 건네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 독하다는 보드카를 컵에 절반쯤 채워주었다.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야간열차에서 술 마셔볼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나는 호기롭게 보드카를 한 입에 털어 넣고 가방에 담겨있던 소주와 생라면을 꺼냈다. 한국에서 한 무더기를 가져왔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귀한 것이었다. 그 뒤로는 다국적 술판이 벌어졌다. 한국산 생라면과 벨기에산 초콜릿, 스위스산 치즈가 안주로 올려졌다. 프라하까지 가는 동안 정차할 역은 한 곳뿐이었고, 새벽 시간에 그 역에서 프라하를 가겠다고 탈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아까는 왜 그렇게 화가 나있었냐는 질문에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자 그녀는 그래도 그 덕분에 이렇게 일행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아서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니, 사실 짜증쯤이야 이미 증발한 지 오래였고, 그 순간에는 마음이 풀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긴장과 짜증을 해소한 기념으로 잔을 비우고, 유럽에서 마주치는 한국 사람들이 흔히들 그렇듯 서로의 여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며칠 간의 여행이며, 인 아웃이 어디인지.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어디가 제일 좋았어?"

"피렌체. 유럽 오기 전에 냉정과 열정사이를 봤었거든. 거기 온 사람들 표정이 다 이렇더라. 꼭 누구 그리워하는 것처럼"


짠.


"너는?"

"나는 비포 선라이즈를 봤었는데. 비엔나는 아니고"


짠.


"그럼 어디?"

"기차. 연습해온 것도 있어"


줄리 델피가 기차에서 내릴지 말지 망설일 때 에단 호크가 자신을 믿고 따라오라며 했던 고개와 손을 까딱하는 동작을 따라 해 보이자(꾸러기 표정 포함)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술기운에 들떠서 소리 내 웃다가 일순간 함께 숨을 죽였다. 여기가 야간열차고 옆칸 사람들이 자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새벽 네 시를 넘어가는 중. 잠시 동안 여기서 자리를 정리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잠깐 망설이다가 술잔을 채웠다. 나는 소리를 잔뜩 낮추고 말했다.


"괜찮아. 외국어는 소음 아니야"


유럽에서는 카페에서 앉아있다 보면 남들 말소리가 전혀 거슬리지 않더라고 외국어는 못 알아들으니까 음악이나 백색소음 같더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근데 왜 속삭이고 있냐는 그녀의 질문에 또 한 차례 웃음이 터졌다가 잦아들었다.


"우리 오늘 잠은 다 잔 것 같다"


짠.


발을 딛고 있는 철판 밑으로 먼 나라들을 관통하는 선로가 이어졌고, 열차는 그 위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철길의 한쪽 끝으로는 지난밤 떠나왔으며 아마 평생 다시 갈 일이 없을 곳이 멀어지고 있었고, 그 길의 반대쪽 끝엔 가본 적 없는 이국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었다. 옆방에서는 눈동자 색이 다른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좁고 단절된 공간이 주는 안정감과 벽 한 칸 너머 이국의 공기가 대비되는 비현실적인 공간에 상상이 퍼져나갔다. 취기는 상상에 부감을 더했다. 마치 기차 위 높은 상공에서 지금 이 자리를 내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는 철길을 따라 푸른 새벽을 부지런히 달리는 열차. 열차의 후미에 불이 꺼지지 않는 객실 하나. 그 불빛 아래에서 이방인들의 이야기는 깊어지고, 다시 우리의 발아래에서는 영사기가 필름을 읽어나가듯 철길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날은 금세 밝아왔고, 곧 프라하에 도착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는 복도로 나와서 창 밖으로 프라하가 가까워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원래 별로 낯가림이 없는 편이야?"

"아니. 나 원래 낯 많이 가려. 근데 여행하다 보니까 이상하게 용감해지더라. 그냥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 걸어보고, 말 걸어오는 사람들한테 대답도 해보고. 그래도 아무 일이 없는 거야. 괜히 쫄았던 거지. 근데 이러다가도 한국 돌아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 같기도 해"

"글쎄... 그건 확인해봐야 알겠는데"


프라하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본 도시의 첫인상은 꽤 몽환적이었다. 블타바 강에서 피어난 물안개가 낮고 넓게 깔려 있었고, 붉은 지붕은 모두 젖어서 갈색 빛을 띠고 있었다. 비가 꽤 요란했는지 건물 옆면도 모두 젖어 있어서 회백색 반죽으로 갓 지어 놓은 집들이 덜 마른 모양 같았고, 몇 백 년은 됐을 건물들이 마치 지은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였다. 프라하도 지난밤에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어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싱겁게 프라하 중앙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열차에서 내려 각자의 우산을 펴고 나란히 걸었다. 이번엔 내 쪽에서 말을 걸었다.


"전화번호 알려줄래?"


그러자 그녀가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는다며 우산을 접고 내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 말이었냐며 웃더니 번호를 찍어주었다. 그리고는 역 앞에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여행 잘하라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연락하자거나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은 없었다. 전화번호를 받고 역 앞에 서서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렇게 하기로 했다. 프라하에서 다시 한번 더 마주치면 한국에 가서 연락하기로.


프라하에서의 일정은 3일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는 코스대로 따라다녔다. 덕분에 한국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지만, 그녀와는 다시 마주치지 못했다. 마지막 날에는 한인민박에서 대학 동기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어느 도시에 있는지도 몰랐던 친구를 딱 마주친 것이었다. 유럽은 이렇게 좁은데 프라하는 왜 그렇게 넓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녀석은 스카이다이빙을 할 것이라고 내게도 프라하에 하루 더 머물면서 같이하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잠깐 망설였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다시 만나려 하는 건 궁색했다. 우연에 맡기기로 했으면 끝까지 우연에 맡겨야지 하루 더 머무는 건 부당한 타협이 아닐까 하는. 그렇게 쓸데없는 고집으로 중무장을 하고 프라하를 떠났다. 그날은 날씨가 아주 맑았고, 기차는 제시간에 맞춰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렇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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