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늦여름 Nov 10. 2020

부모님 몰래 다녀온 유럽여행기

재수 때 비망록이라는 노트를 만들었다. 표제는 버즈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다. 딱히 그 노래를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라는 뜻이 찰떡이라고 생각했다. 노트에는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일들을 적었다. 일단 대학만 가면 벚꽃축제도 가고, 미팅도 하고, 해운대도 놀러 가겠다며 놀라운 속도로 노트를 채워나갔다. 지치고 힘들 때 그게 꽤 힘이 됐다.


비망록에는 금방 해낼 수 있는 일들도 있었지만, 유난히 굵직굵직한 프로젝트가 몇 가지 있었다. 걔넨 방학 때마다 하나씩 해치우기로 했다. 1학년 여름 방학 때는 자전거 국토종주, 겨울 방학 때는 영화 100편 보기, 2학년 겨울방학 때는 신림동에서 고시공부. 이런 식이었다. 순조롭던 비망록 수행기는 고시 1차에 덜컥 합격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행정고시는 1차에서 10배수를 뽑기 때문에 1차 시험은 요식행위이고 사실상 2차 시험이 전부라고 봐도 무방한데, 고향에 계신 부모님은 이미 절반 합격한 걸로 굳게 믿어버리셨다. 그런 게 아니라고 아무리 손사래를 쳐도 그것마저 아들의 겸양으로 받아들이는 한 쌍의 고슴도치가 되어 버리신 후였다.


그즈음 나는 3학년 여름방학을 위해서 유럽 배낭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내가 고시에 합격하면 고향 동네에 플래카드를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신다는 어머니에게 여행계획을 사실대로 알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공리주의적인 선택을 하기로 했다. 부모님께는 휴대폰을 정지하고 한 달간 절에 들어가서 고시공부를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그 길로 유럽으로 떠났다. 왕복 비행기 편과 유레일 패스 이외에는 아무것도 예약하지 않은 채로 대책 없이 출발했다.


여행은 첫날부터 고난이었다. 로마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도착했더니 이미 저녁 9시가 넘었다. 첫 해외여행이라 시차를 고려하지 못했다. 유럽의 밤은 고요했다. 서울의 밤거리를 상상했던 우리에겐 당혹스러운 풍경이었다. 가이드북을 뒤적거려 겨우 한인민박을 잡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우리 무대책 3인방은 태생부터가 대책 없이 결성되었다. 재미없기로 유명한 강의시간에 맨 뒷자리에 앉은 셋이서 "유럽 배낭여행이 그렇게 좋다더라" "나도 언젠간 가고 싶었다" "그럼 가자"의 3단 논법으로 의기투합했다. 4명이 아니고 3명이었던 건 의견이 갈리면 다수결로 중지를 모으기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성급한 결정이 으레 그렇듯 우리는 금방 파국을 맞았다. 나를 제외한 흡연자 2인이 공금으로 담배를 사자며 날치기 입법을 추진하기에 소수파인 나는 로마 한복판에서 필리버스터를 시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첫 단추가 불복으로 끝난 의사결정기구는 사사건건 말썽이었다. 동선과 일정을 하나도 정하지 않아서 낭만적이라던 우리의 여정은 금세 불화로 채워졌다. 결정의 순간마다 엇갈렸다. 일주일째 되던 날, 파리에서 갈등은 우리의 똘레랑스를 넘어섰다. 내가 대안을 제시했다.


"야, 우리 따로 다니자"


B는 역정을 냈고, L은 서운해했다. 따로 다니면 우리 셋이 투닥거릴 시간에 진짜 여행에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설득도 하고 통사정도 했다. 차분히 생각해보니 자기들 보기에도 우리가 그리 애틋한 사이도 아니고, 혼자 다니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는지 금방 동조해왔다. 다음 날부터 쿨하게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우리의 일정은 총 30일이었는데, 그 뒤로는 정말로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여행하다가 귀국하는 비행기도 모두 따로 타고 왔다. 여행 직전에 인생에서 첫 여자 친구를 만났던 L은 여자 친구가 보고 싶다며 중간에 여정을 포기하고 비행기를 2주 앞당겼다. 스물세 살에 Frank sinatra의 my way를 애창곡으로 부르던 B는 체코에서 스카이다이빙을 꼭 해봐야겠다며 3일을 연장했다. 나는 당초 일정대로 변경 없이 귀국했다.


따로 여행을 다니기로 한 것은 셋 모두에게 좋은 결정이었지만, 특히나 나는 더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긴축 재정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부모님께 경비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나는 그 뒤로 거의 절간 생활을 하듯 풀과 빵을 씹었다. 육류를 섭취한 건 손에 꼽았다. 나중에 혹시라도 부모님에게 몰래 유럽여행의 진실을 밝히게 된다면, 먹고 다닌 건 절밥이랑 다름없었으니 절반만 혼내달라고 할 참이었다. 당시 유로/원 환율은 1,900원에 육박하는 역사적 고점을 찍고 있었는데, 한 달 간의 유럽여행 경비는 비행기 값, 유류할증세 포함 총 380만 원 밖에 들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금액이지만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거기다가 잘 거 안 자면 가능한 일이었다. 여행 예산에서 가장 큰 파이는 숙박료인데, 노숙과 야간열차에 몇 박을 할애하면 총액이 눈에 보이게 줄어든다. 유럽에서 노숙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공항이다. 유레일 패스만 있으면 공항철도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지. 새벽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안전하지. 아침이면 새벽예배를 드리는 이슬람 신도들의 소리에 모닝콜도 필요 없이 재깍재깍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의식주를 염가에 해치운 덕분에 나는 거의 집시나 다름없는 꼴을 하고 유럽을 활보했다.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행이 생겼다.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미성년자 3인방(고2, 고1, 중3)과 함께 다녔다. 걔넨 자기들이 원한 것도 아닌데 모험심 강한 부모님들의 합의 하에 유럽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야경을 보고 싶은데 밤길이 무섭다는 어린이 3인방을 이끌고 그랑플라스로 나갔다. 광장이 너무 멋있어서 넋을 놓고 보다가, 눈 앞에서 어이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대학 후배 두 명이 다른 한국인 여자분 두 명에게 동행하자며 수작질을 부리더니, 거절을 당하고 돌아서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후배들까지 합류해서 우리 6명은 브레멘 음악대처럼 브뤼셀의 밤길을 누볐다. 나중에 어린이 3인방을 부다페스트 길을 지나다 다시 만났다. 유럽이 꽤 좁다. 여행 3주 차가 된 걔네들은 이제 지도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그 외에도 스페인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는 아저씨, 야간열차에서 밤새 보드카에 소주를 말아서 나눠마셨던 제천의 초등학교 선생님, 연애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하던 진주 누나들 등등 다른 나라, 다른 일행들과의 만남으로 여행이 풍성했다.


30일간 다녔던 국가와 도시를 요약해보면 이렇다. 이탈리아(로마-피렌체-친퀘테레)-스위스(스피츠-인터라켄-취리히)-프랑스(파리)-벨기에(브뤼셀-브뤼헤)-독일(뮌헨)-오스트리아(빈-그라즈)-헝가리(부다페스트)-체코(프라하)-독일(프랑크푸르트). 8개국, 13개 도시. 군데군데 야간열차로 이동시간을 아껴가며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만큼 시간과 돈을 아낀 탓이었을까. 한국에 돌아온 나는 한동안 몸이 축나서 시차적응도 제대로 못하고 물갈이를 했었다. 어머니는 고시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길래 이렇게 피골이 상접했냐며 걱정을 하는데, 아픈 와중에도 죄책감이 밀려들어왔다.


그렇게 난처한 상황때문에 미루었던 자백은 2년 후 영원히 없을 일이 되어버렸다. 첫 월급으로 드릴 선물을 고민하다가 어머니가 교회에서 필리핀 봉사를 간다기에 그 비용을 대드렸다. 어머니는 아들도 해외여행 한 번 안가봤는데 자기를 보내준다고 연신 고맙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니라고(진짜 아니어서) 그러시지 말라고(진짜 죄책감이 들어서) 만류하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평생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사는 것이 어른이구나. 그 이후로 또 10년이 지났지만, 아직은 어른스럽게 잘 숨기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가 사준 운동화는 늘 회색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