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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Dec 31. 2020

나만 첫사랑 없어

플립&귀를 기울이면


첫사랑. 아무리 우려먹어도 진부하다는 욕을 먹지 않는 로맨스의 사골 소재. 이쯤이면 물릴 법도 한데, 여전히 숱한 첫사랑들이 소설, 음악, 영화, 매체를 가리지 않고 애틋함을 뿜어낸다. 진부함은 창작의 적이지만 첫사랑에게는 면죄부라도 주어진 것처럼 계속해서 회자된다. 창작물 시장에서 첫사랑은, 불황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스테디셀러다. 


코스피가 역사상 고점을 찍는 이 호황 속에도 누군가의 계좌는 퍼렇게 멍이 들었다는 풍문처럼 나한테는 첫사랑 얘기가 그렇다. 나는 첫사랑 영화를 보면 오히려 침울해지곤 하는데, 그 작동 기재는 이렇다. 얘도 저렇게 풋풋하고 쟤도 저렇게 풋풋한 걸 보면 세상 사람들 다 풋풋한 첫사랑 하나쯤 다 갖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저런 기억이 없을까. 망할. 이건 다 남중 탓, 남고 탓, 남녀공학이 부족한 대한민국 교육제도 탓. 이탓저탓하다가 빈 속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포샷을 때려 박은 듯 쓰린 속을 부여잡고 얼음을 으득으득 갈아 씹으며 입만 또 삐죽. 상한 속을 게워내며 전방에 3초간 함성.


아! 나만 첫사랑 없어!



불가사의한 일이다. 분명 나만큼이나 첫사랑 없는 어린 날을 보낸 사람이 많을 법도 한데, 다들 첫사랑 이야기에 저마다의 추억에 잠긴다. 근데 이 사람 눈동자가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데, 어? 왼쪽 위가 회상이고, 오른쪽 위는 상상..? 잡았다 이놈. 너도 북어구나. 아무렴 그렇지. 현실에서 건축학개론 같은 첫사랑의 추억이 있기가 쉬운 일인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니. 포스터 문구에서부터 각잡고 거짓말하겠다는 티가 팍팍 나죠?



첫사랑! 하면 떠오르는 건 수지 아니면 소나기. 다 남들 첫사랑이다. 정확히는 모두의 첫사랑. 명확히 떠오르는 현실의 누군가가 있다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무순위 청약급 뽑기 운으로 당첨된 사람. 부러운 사람. 나를 위시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첫사랑은 본질적으로 미화되었거나 심지어는 통째로 가상의 추억이다. 매체가 만들어 준 가상의 추억을 집단으로 곱씹는 일종의 동화같은.


누구나 첫 번째 사랑은 있지만, 걔네가 다 첫사랑은 아니다. 첫사랑은 단순히 순서상 처음 오는 사랑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옳은 표기는 '첫 사랑'이 아니고 '첫사랑'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와 같이 순서를 셀 때, '첫'은 순서상 가장 먼저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관형사이기 때문에 띄어 쓴다. 첫사랑을 띄어 쓰지 않고 붙여 쓰는 이유는 첫사랑 자체로 고유한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랑이 아니라, 그냥 첫사랑. 그리고, 이러한 첫사랑의 고유한 지위는 첫사랑 신화로 강화된다. 남자는 평생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거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거나. 손톱에 들인 봉숭아 물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그리고 어차피 신화라는 게 믿거나 말거나요. 안 믿더라도 재미로 볼 수는 있는 노릇이니. 재미있는 첫사랑 신화 두어 개 소개한다는 게 이렇게 썰이 길었다. 범람하는 첫사랑 영화 중에서 기왕 몇 편 골라서 추천하는 거, 좀 더 유익하게 묶어봐도 좋을 것 같다. 


보고 나면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첫사랑 영화. 플립과 귀를 기울이면. 


어째서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지 두 어르신의 대사를 보자. 


영화 <플립>


어떤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광택 나는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빛나는 사람을 만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은 일생에 단 한번 무지개 같이 변하는 사람을 만난단다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더 이상 비교할 수 있는 게 없단다

.

                                             


영화 <귀를 기울이면>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법은 그 나름대로 힘들단다. 




어차피 어린 날로 돌아갈 수도 없고, 나처럼 막상 돌아가더라도 걔네 같은 첫사랑은 못해 볼 팔자라면, 과거 말고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이 영화들 보는 걸 추천한다. 아마 둘 다 보고 나면 장래희망은 첫사랑 영화에 나오는 성숙한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그게 있지도 않은 첫사랑을 습관적으로 그리워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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