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발랄 Jul 11. 2022

여름밤의 살구 설탕절임

살구가 안쓰러워서, 절임을 만들었다 

필라테스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땀을 식히기 위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겸 습관적으로 마트에 들른다. 마트를 한 바퀴 도는데, 한 구석에서는 정가의 50%가 된 3,990원짜리 살구가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할인 코너에 놓여있었다.


살구는 뭐랄까, 과일 중에서도 비주류의 느낌이 있다. 수박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딸기처럼 귀엽지도 않은 데다가, 사과처럼 꾸준한 물량 공세의 느낌도 없다. 누군가의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되기에는, 되게 열심히 산 것 같지도 않고, 또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살구는 항상 잘 팔리지 않는 느낌이다. 이맘때쯤 떨이로 파는 것을 예전에도 본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살구가 안쓰러웠다. 한 때는 뜨거운 태양을 머금으며 영롱한 주황빛을 자랑했을 살구가, 마트 조명 아래에서 시들시들해져 가는 모습이 불쌍했다. 왠지 내가 사지 않으면 아무도 사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마음에, 집에 데려왔다. 


집에 돌아와 무심히 살구 설탕절임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살구를 툭툭 반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떨이로 판매하는 상품답게,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속에서부터 곰팡이가 슬기 시작한 것들도 꽤 있었다. 그런 것들은 수챗통에 버리고, 먹어도 탈이 나지 않아 보이는 것들만 살렸다. 그 사이 물을 펄펄 끓여, 유리병을 소독하고 다시 물을 끓여, 오래되어서 굳어버린 설탕을 넣고 다시 끓였다. 그리고 살구를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끓는 설탕물을 끼얹었다. 그렇게 하고 나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이제 상할 일도, 곰팡이가 슬 일도 없을 거야, 썩을 일도 없을 거야. 어쩌면 내가 설탕을 덜 넣어서 맛이 싱거워질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너희도 누군가에게 부족하나마 관심을 받았잖니, 그러니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일단 살구 설탕절임에서 그럴듯한 향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끌리듯이 키보드 앞에 앉았다.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버려진 살구를 절임으로 만들고 나자, 올여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만 알고 있는 순간들에 대해 쓰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오늘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버려진 논에서 살고 있던 하얀 백로 여러 마리를 보았다. 길가여서 차가 많이 다니는 데도 사람들의 손이 타지 않는 곳이 되자, 백로들은 자유롭게 노닐었다. 


무더운 날 아침, 운동하러 가는 길에 다리를 건너는데, 엄청 많은 송사리 떼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지난주 토요일, 아가는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분수를 태어나서 처음 보고 신이 나서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복직 후 돌아간 사무실에서, 자리를 예전처럼 어지르지 않고 틈날 때마다 치운다. 이 자리가 꽤나 소중한 자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남편 귀밑 흰머리를 뽑아주면서, 그래도 아직 뽑아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집을 떠난 고양이들의 소식을 종종 들으며, 응원한다.


살구 설탕절임처럼, 언젠가 나도 여름날의 기억들을 저장해놓은 이 브런치의 글을 보며 지금을 회상할 것 같다. 한입 베어 물면 달콤하고 아련한 맛이 나지 않을까? 뭐, 무더운 한여름밤의 지극히 감상적인 느낌이 더해지긴 했어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워킹맘 이발랄씨의 공유라이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