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미래를 묻는 사람

by 지안

올해도 보고야 마는 신년 운세. 습관처럼 화면을 내리다 멈춰, 소띠 부분을 찾아 85년생 운세를 읽어본다.

겉으로는 기회가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준이 있는 사람의 해. 기준이 있는 사람이 길을 얻는다.

대체 이건 무슨 말이지?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라는 뜻일까. 모호한 문장 앞에서 잠시 멈칫하지만, 일단 좋은 말인 것 같으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패스한다.

연애운 같은 건 기혼자에게는 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무용지물이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 금전운이야말로 현대인의 가장 큰 관심사다.

버는 것보다 덜 새는 것이 남는다.

이건 뭔 선무당 잡는 소리인지. 돈을 벌긴 번다는 건지, 지출을 줄이라는 건지, 아니면 욕심내지 말라는 뜻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늘 그렇듯, 두리뭉실한 운세풀이에 나만의 해석을 갖다 붙이고는 발끝까지 조여오던 불안을 잠시 내려놓는다. 어쩌면 운세를 보는 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마음을 잠시나마 달래려는 한낱 인간의 발버둥인지도 모른다.



타로 카드, 심리테스트, 별자리운세 그리고 MBTI까지. 자의식이 자라던 초등학생시절부터 지금까지 각종 운세와 테스트를 빠짐없이 확인하고 나서야 ‘나’란 사람의 정체성을 찾은 듯 안심하곤 했다. 결과지에 적힌 몇 줄의 설명은 신기할 만큼 그럴듯했고, 단어 하나하나에 나를 끼워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10대, 20대 청춘은 가능성이 열려있는 만큼 앞을 알 수 없어 늘 불안한 시절이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과 비슷했다. 남들은 다 방향을 아는 것 같은데, 나만 지도 없이 낯선 길에 내려진 기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점괘와 결과표 속 문장에서 작은 힌트라도 찾고 싶었다. 누군가 ‘괜찮아, 너는 이쪽 길로 가면 돼.’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전공 실험 시간, 브레드보드(사용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컴퓨터 부품들을 설치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서로 연결된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 플라스틱 회로 기판)의 좁은 구멍마다 빽빽하게 전선을 꽂으며 회로와 씨름하던 시절이 있었다. 전자 부품들의 이름은 낯설었고, 실험실 특유의 공기는 늘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회로가 한 번에 작동하면 다행이었지만, 어디선가 연결이 잘못되면 처음부터 다시 확인해야 했다. 내게 그 시간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것처럼 늘 버거웠다.


졸업 후에는 공대 아름이였던 나의 대학시절을 고이 접어두고, 의학계열로 진로를 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학문적이지 않았고, 먹고사니즘의 압박이 ‘취업’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때도 나는 예쁜 ‘여신 타로 카드’ 한 벌을 장만해 자주 점을 봤다. 오늘의 과제를 잘 해낼 수 있기를, 실수하지 않기를, 앞으로의 길이 조금은 선명해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숙사 책상 맡에서 카드덱을 펼쳤다. 해설서를 뒤적여가며 하루의 운을 예측했고, 어떤 불운 속에서도 카드 속 아름다운 여신들이 나를 수호해 주기를 바랐다.


DALL.E 생성 이미지


약 15년이 지난 지금, 챗GPT로 프롬프트를 입력하기만 하면 사주, 점성술, 수비학까지 포함한 나의 종합적인 운세를 엔터 한 번에 손쉽게 받아볼 수 있다. 예전처럼 카드를 섞고, 해설서의 작은 글자들을 찾아 읽을 필요도 없다. 첨단을 달리는 AI 시대이지만,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구만 바뀌었을 뿐.

대운이 들어오는 시기와 그것을 위해 2026년 해야 될 일에 대해 넌지시 질문해 본다. ‘대운’이라는 말만 들어도 괜스레 마음이 들썩인다. 유의어로는 ‘대길’쯤 되지 않을까. 이름만으로도 복이 굴러 들어올 것 같다. 기대에 찬 마음으로 질문을 입력했는데, 대운이 이미 들어오고 있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 한 줄에 나는 한껏 고양된다. 별 것 아닌 문장인데도 이상하게 어깨가 펴진다. 오늘부터 뭔가 잘 풀릴 것만 같다.

정말 대운이 들어온 걸까? 그 질문을 품은 채로 시작하는 아침 공기는 차고 맑다. 휴대폰 액정에 비치는 내 얼굴은 어제와 같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오늘이 그날 일지도 몰라.’라는 희미한 설렘이 배어있다. 이쯤 되면 운세가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다. 기대감만으로도 하루를 조금 더 가볍게 살아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밤이 되어 집안의 모든 소음이 잦아들고 방 안이 고요해지면, 나는 슬며시 노트북을 펼친다. 타닥타닥. 흰 화면 위에서 커서가 깜빡인다. 한참을 바라보다 언제나 그랬듯, 한 문장 적어 내려가는 일로 매번 나의 운을 점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매일 운세를 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매일 운을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누군가 정해준 운명에 내 삶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써 내려가는 이 시간이야말로 나에게는 대운이 올 자리를 닦는 경건한 의식이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떤 선택이 옳은지, 정말 대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끝내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망설이던 마음으로도 자리에 앉았고, 미루고 싶던 순간에도 오늘 해야 할 몫을 조용히 해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원고도 이렇게 또 한 꼭지를 마무리했으니, 오늘 운세는 누가 뭐래도 길(吉)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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