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까지 해야 될 일이 뭐지?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이는 나의 무거웠던 엉덩이가 달싹거리기 시작한다.
아들내미 학교 준비물은 왜 잠들기 전에 생각나는지.
내가 가장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단연 벼락치기다.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다져진 벼락치기 실력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쓰여왔다. 벼락치기를 하려면 소스가 필요한데, 평소에 내가 정리해 왔다면 가장 좋고 그렇지 않으면 친한 친구들의 힘을 빌어 정리본을 얻어야 한다. 밥을 사주거나, 간식을 사주거나, 가방을 들어주던지 뭐라도 해라. 정리본만 있다면 벼락치기 그 까이꺼 대충 어렵지 않다. 고득점을 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소위 저공비행으로 낙제를 면할 정도로 목표치를 설정하는 것이 몸도 마음도 그나마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이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정리본을 갖고 달달 외우기 시작한다. 예제나 기출문제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빠르게 1 회독을 하고 문제를 풀어가며 다시 머릿속에 저장하는 시간을 갖는다. 남은 시간에 따라 1 회독을 더할 건지는 선택사항이다. 보통 이 선택사항은 촉박한 시간 덕에 나의 의지와는 관련이 없다. 고사장에서는 시험 시작종이 울릴 때까지 문제 푼 것 중 틀린 것을 위주로 다시 한번 살펴본 후 머릿속 구겨 넣은 정보들을 쏟아낸다는 느낌으로 시험을 친다. 다 쏟아내 버려 끝난 후에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다는 상상까지 하면서 말이다.
뭐든지 미리 하면 이런 스릴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수명이 늘어났을 것 같은데, 좀처럼 계획조차 세워지지 않는 건 아마 나의 도둑맞은 준비력 때문일 것이다. 공부하면서 많이 바뀌긴 했지만 타고나길 P형 인간으로 옷장이고, 책상이고 정리 정돈이란 것을 좀체 찾아볼 수 없는 환경을 만들면서 지냈다. 외골수 같으면서도 산만한 모순된 부분이 가슴 졸이는 벼락치기를 좀 더 용이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시험에서만 벼락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아들내미 학교 준비물부터, 엄마 생신 준비, 이사 준비까지. 벼락치기 인간인 나는 그야말로 닥쳐야 머리털이 쭈뼛서게 동분서주하는 철저히 충동적인 진화가 아직 덜 된 사람인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미루다가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져 탭댄스를 춰야 할 판일 때 비로소 시동이 걸리다니. 내 준비력은 누가 훔쳐간 걸까. 이런 허둥지둥 성향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운이 좋게도 간신히 턱걸이로 많은 것을 이루어왔다. 정리본 보여줬던 나의 친구 냥냥이, 시험 스터디 모임에 나를 참가시켜 준 고마운 땡땡이, 이사 준비 잘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미리 알려준 나의 남편, 아들내미 학교 준비물 알려주는 알리미 앱까지 연말을 맞이해 감사패라도 증정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새해에도 머릿속에 계획이라곤 희뿌연 안개뿐인 상태이지만, 벼락치기라도 하는 게 어디인가. 어설프게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다. 물론 미리 하면 더 좋겠지만. 2025년 새 다이어리를 펼치며 '이번에는 꼭'이란 마음으로 to do list를 작성해 본다. 새해 다짐도 벼락치기로 2024년 마지막날에 하다니. 그럼 어떠냐.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