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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세시공작소 Mar 24. 2021

집에서 일하고 먹기

준비 없이 맞이한 격리생활

코로나 사태 초기에 우리 팀과 사무실을 공유하는 모르는 사람이 확진이 되어 팀 사람들 전체가 코로나 검사를 받고 격리되었던 적이 있다. 다행히 우리 팀 사람들은 음성이었으나, 이 일로 코로나는 누구나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준비 없이 격리된 6일 동안은 그대로 손 발이 묶버렸다.

원시 인류가 동굴에서 나와 밖으로 발을 디딜 때를 떠올려보자. 공간을 이동하면 해야 할 과제도 달라진다. 방금까지는 돌을 갈아 화살촉을 만들려고 애써 봤지만 잘 되지 않아서 속상했다. 그렇지만 동굴 밖으로 나온 지금 그 기분에 얽매일 필요가 과연 있을까? 지금 당장 할 일은 저 수풀 사이에 혹시 사냥감이 있지 않나 살피러 가는 것 아닐까? - 빌터 슈미트, 공간의 심리학

그런데 지금은 동굴 밖으로 나가 볼 수도, 저 수풀 사이에  혹시 사냥감이 있나 살피러 가는 것조차도 카메라 달아놓고 원격으로 집 안에서 해야 하는 상황이다. 공간을 이동할 수 없는데 해야 할 과제는 복합적이니 도무지 쉽지가 않다.


집에서 집으로 출퇴근하기

재택으로 전환된 업무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굴러가게 만들어야 했다. 문제는 준비되지 않은 인프라. 갑작스럽게 많은 인원이 집에서 일을 해야 하니 사내 시스템에 접속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아이가 있는 집은 아이들도 원격 수업을 받다 보니 PC 부족해서 우왕좌왕하는 사태 발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접속이 잘되는 몇몇에게 전화로 부탁해서 급한 일부터 해결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사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책상과 모니터를 샀었다. 업무환경을 구축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접속이 잘되는 몇몇 중 한 명이었다. 서로의 상황을 모르니 이른 아침부터 머리를 감다가도 전화를 받고, 밥을 먹다가도 전화를 받고, 화장실에 있다가도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는 다급한 업무 요청과 엄마 아빠가 다 같이 집에 있어서 신난 어린이 친구들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접속이 잘 되는 사람이나 안 되는 사람이나 힘들고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밥 챙겨 먹는 것도 일이다

오전 내내 정신없던 시간이 한차례 지나고 배가 고파 시계를 보니 정확히 점심시간이었다. 이제 밥을 먹어야 하는데, 집에 먹을 것이 없다. 평소에 식사를 주로 밖에서 하니까 집에서 뭔가를 잘 먹지 않았었다. 집에서 먹는 건 바나나나 단백질 바 같은 간편식, 그리고 빵과 커피 정도? 그래서 전자레인지도 없었고 싱크대의 가스레인지 자리엔 토스터가 놓여 있었다. 조리가 필요하면 상을 펴고 인덕션을 가져와 그때그때 코드를 연결해서 썼었다.

인덕션을 쓸 때마다 꺼내야 해서 라면 한번 끓여먹기도 참 귀찮은 구조였다.

배달음식도 쓰레기를 버리기가 귀찮아서 잘 안 먹었었는데, 설거지와 쓰레기가 그나마 덜 나오는 햄버거는 종종 시켜먹었다. 코로나 검사를 받으면 언제까지 격리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배달음식만으로 버티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아서 라면이라도 쉽게 끓여먹을 수 있는 구조로 바꾸기로 했다.

인덕션을 그냥 두면 싱크대보다 높이가 낮아서 프라이팬을 올릴 수가 없다. 사이즈가 맞는 서랍과 선반을 두어 높이를 맞춰주었다.

싱크대는 가스레인지 크기에 맞춰져 있고, 수납공간은 부족해서 가전을 딱 맞게 배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빌트인을 하는구나' 느꼈지만 전셋집에서는 어쩔 수 없다. 침착하게 줄자를 들고 치수를 잰 뒤 인터넷을 뒤져서 크기가 맞는 제품을 찾아 해결하였다.

집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멀티탭을 그냥 두기에는 너무 위험해 보였다. 혼자서도 여러 번 걸려 넘어졌다.

수납의 문제는 어찌어찌 해결했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애매한 콘센트 위치. 멀티탭을 연결해서 최대한 해결해보려 했지만 싱크대 아래쪽에 둔 전자레인지는 아직도 쓸 때마다 전기를 끌어와서 꽂아야 한다. 사실 전자레인지는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최대한 안 사려고 했던 것인데, 구매 후 각종 즉석식품과 냉동식품을 조리하는 데 있어 삶의 질이 매우 상승하였다. 그 전에는 즉석 밥을 조리해 먹으려면 끓는 물에 넣고 15분씩 끓여야 했었다.

가스레인지 자리에 있던 토스터와 커피포트는 선반 위로 올리고, 싱크대 수납공간에 있던 후라이팬은 선반 아래쪽에 공간을만들어서 수납박스와 함께 넣어주었다.


강제 집콕, 그 이후

코로나 검사 결과 음성 판정을 받고 격리가 해제되어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없는 건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준비 없는 격리로 시작됐으나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는 필요했다. 쓱배송으로 장을 보고, 주말에는 요리도 하면서 1주일치 식사를 미리 준비하는 밀프렙을 하게 됐다. 카레를 4인분씩 만들거나 재료를 소분해서 냉동실에 두고, 배달음식을 주문할 때도 넉넉하게 시켜서 냉동실에 소분해 두고 오랫동안 먹는다. 혼자 살다 보니 업무 외에는 사람들하고 말을 한마디도 못 해서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나누던 가벼운 농담들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래서 최근에 게임을 시작했다. 마이크를 켜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기 위해서. 왜 요즘 게임회사 매출이 올랐는지 몹시 이해됐다.


갑작스레 재택근무를 하는 날도 많아졌다. 이런 날은 출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씻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집에서 일을 하면 시간의 흐름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때가 있는데 이럴 땐 라디오를 틀어두는 게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다들 시스템에 적응해서 처음처럼 혼란스러워하지는 않고, 급작스럽게 한두 명이 사라지더라도(?) 공유해야 하는 부분은 어떻게든(!) 체방에 초대해서 해결한다. 불편하지만 모두들 최선을 다해서 적응하고 있다.


'집에서 일하기'는 여전히 이해중

재택 초기에 가장 필요하다고 느낀 건 전반적인 인프라의 확충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인프라(infrastructure)는 도로, 수도, 발전소 같은 기반시설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인프라를 특정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메신저나 VDI, 원격 데스크톱, 화상회의 서비스 같은 가상의 환경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재택근무 환경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집과 분리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재택근무의 가장 큰 어려움은 공간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출근과 퇴근의 공간적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에, 일을 하고 있어도 빨래가 신경 쓰이고 점심 먹은 설거지도 화장실 청소도 울고 있는 아이도 신경 쓰인다. 사실 사무실에 있어도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는 비슷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환경적 요소는 유리한 부분도 있고 불리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재택 환경에서는 업무용 서비스와 연결이 끊어지면 출근이 취소되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회사와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인터넷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EU에서는 OTT 업체들에게 화질을 낮추어 서비스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출처: S&T GPS)

심장이 멈추면 사람이 죽듯이, 모든 서비스는 '운영'이라는 분야에 지속적으로 투자하지 않고 사용량 증가에 대비하지 못하면 즉시 죽는다. 특히 IT 인프라는 별도의 조직이나 회사에서 전담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비스가 돌아가느냐 마느냐를 책임지는 매우 중요한 부분임에도 어지간한 장애가 발생하지 않으면 투자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다. 재택근무 수요 급증으로 인해 이런 문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회선 전체적으로 사용량이 늘어났기 때문에 이젠 접속하는 쪽에서도 대부분의 원룸에서 쓰는 100MB짜리 기본 인터넷으로 버틸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해외 개발자들 중에는 실제로 인터넷 자체가 느려서 접속을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고 코로나가 진정국면에 접어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나, 이렇게 집에서 일하는 근무형태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먹고살기 위해 '집에서 먹기'를 비대면 배달 서비스로 해결하자 한다면, 또 다른 먹고사는 문제인 '집에서 일하기' 있어서우리는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해야 할 듯하다. 아직은 집에서 일하기도 마냥 쉽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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