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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중 Aug 22. 2020

사회적 약자를 본다는 것,

임계장 이야기를 읽고, 세네카와 조지 오웰을 떠올리며,

 어제 읽은 '임계장 이야기'는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를 담은 에세이다. 38년간 공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던 저자가 퇴사 후에 버스터미널 계장, 아파트 경비원, 빌딩 관리원 등으로 일하며 겪은 일이 담겨 있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라 보면서 엄청난 노동 강도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인상 깊게 남았다. 책을 덮고 나니 세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남았는데, 첫째는 왜 경비원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하는가? 둘째는 경비원을 대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 셋째는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였다.




 경비원 업무는 어디까지인가


"아파트 경비원 처음이죠? 일과표에 적힌 건 실제 하는 일의 10분의 1도 안 돼요. ~ 근데 최저임금이 좀 오르니까 경비 인원을 6명이나 줄였어요. 전에는 7명이서 하던 일을 이젠 혼자 하는 거라 보면 됩니다."
버스 회사에서는 1인 3역을 시켰는데 여기서는 1인 7역을 시킨다는 말인가. 그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 p.59, 임계장 이야기,


 책에 나온 경비원 업무 표를 보면 하루 종일 업무가 가득 차 있다. 화단 청소, 쓰레기 청소, 택배물 접수, 순찰 등등. 물론 모든 경비원들이 이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저런 강도로 일을 한다는 사실이 꽤나 놀랍게 다가왔다. 평소에 주의 깊게 지켜볼 일이 없어서일까.

 

 그렇지만 경비원은 법정 최저 일급을 받는다. 철저히 수요-공급을 따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비원이 되고 싶어 하는 - 소위 임계장이 될 수 있는 후보자- 사람들은 많은데, 경비원의 수요는 적기 때문이다. 만일 현재 경비원이 일을 제대로 못 하거나 아프면 바로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경비원 업무는 왜 그렇게 많을까? 애초에 경비원이 그렇게 다양한 일을 해야만 하는 걸까? 책에 적힌 바로는 최저 임금이 오르면서, 정해진 경비원 급여 예산을 지키기 위해 여러 사람을 자르고 한 사람에게 일을 몰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 사람이 어찌어찌 일을 해낸다. 비록 그 사람이 과로에 몸과 마음이 병들고, 얼마 가지 않아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경제 주체가 각자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과연 이게 옳은 일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이게 옳지 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본적 이익을 위해 한 개인에게 과도한 고통이 가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마치 기계부품처럼 교체될 수 있는 관점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처럼.




경비원을 하대하는 몇몇 사람들,


아파트 경비원은 민원의 총알받이이자 자치회와 관리소의 칼과 방패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자치회나 관리소는 주민이 싫어하는 말은 절대 하지 않고 곤란한 일은 다 경비에게 떠넘기거든요.

 - p.62, 임계장 이야기 중


 게다가 경비원을 대하는 입주민들의 태도도 아주 다양하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선량하고, 그중에 아주 일부의 사람만 문제를 일으킨다고 적혀 있지만, 그럼에도 일부의 사람이 주는 고통이 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주차 공간 다툼이나 수많은 민원들 뿐만 아니라 경비소장과 아파트 자치회장 등의 상층 권력부에서 내려오는 업무들까지.


 경비원을 하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이런 것일까? 평소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면 받는 대우에 익숙해져 있어서 자연스레 경비원을 낮게 보고, 반대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면 그래도 자신은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니까 경비원보다는 높다는 우월감 때문일까?


 이는 경비원들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만족감을 느끼는 경비소장과 자치회장의 행동 심리와 비슷한 게 아닐까? 어쩌면 인간은 작은 권력을 가질수록, 자신이 갖고 있는 작은 권력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과도하게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화에 대하여,


 그러나 화는, 우리의 명령대로 패주시킬 수가 있다. 화는 우리의 의지에 좌우되는 마음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 p.85,  화에 대하여, 세네카


 인간관계에서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화'다. 경비원이 내 차에 주차금지 스티커를 붙여서, 경비원이 쓰레기를 제때 치우지 않아서, 경비원이 내가 하는 말에 말대꾸를 해서, 아파트 주민은 화를 낸다. 인간이 화를 내는 까닭은 자신의 의지대로 일이 수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화를 내는 건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화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보인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화는 오로지 인간만이 갖고 있는 특성이다. 정확히는 어떤 일이 닥쳤을 때 화가 나는 건 자연스러운 행위지만, 이를 표출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 이성대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세네카의 말처럼, 화는 이성으로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다. 비록 화가 나는 순간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아주 잠깐만 심호흡을 하며 잠시나마 시선을 돌리며 여유를 가지면, 화는 꽤나 빠르게 누그러진다. 그럼에도 화를 내는 건 그런 짧은 여유를 가지기 힘든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여유가 없어지는 건 자본주의적 들볶임 때문이 아닐까? 자본적 이익을 위해 사람에게 부과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여유는 점점 줄어들고 마음은 조급해지기에, 결국 화를 잠시나마 유예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마저 없어지는 것이다. 개인이 행복하려 자본을 추구하는 원인이, 자본 때문에 인간은 불행해지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왜 우리가 약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경비원들의 삶에, 사회적 약자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보다는 자신이 사회적 약자가 되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무한 경쟁이 기본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는 약자가 되는 게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자신이 능력을 갈고닦아서, 사회 속 사다리를 하나씩 타고 올라가면 되는 게 아닌가? 자연에서 약한 개체는 도태되고 강한 개체는 살아남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아마도 그 이유는, 첫째로 개인의 능력은 지극히 사회적인 관점에서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학업 성적이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여겨진다. 학업 성적이 좋으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기업에 취직하여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개인의 능력은 사회적 시기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게 아닐까? 오로지 무력이 중요했던 고대에는 학업 성적이 과연 능력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저분이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는 더없이 권세가 컸던 오이디푸스요. 어느 시민이 그의 행운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보시오. 그런 그가 얼마나 무서운 불운의 풍파에 휩쓸렸는지! 그러니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 오이디푸스 왕 중 , 소포클레스


 둘째는 사회적 강자도 한순간에 약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 속 오이디푸스가 한순간에 나락에 떨어졌듯이, 공기업에 근무할 땐 사회적 강자였던 이 책의 저자도 이후에는 약자가 되었다. 만약 자신은 이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면, 굳이 보험을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설령 자신이 사회적 인정을 받는 강자라 할 지라도 자신의 후손 역시 그런 능력을 가진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물론 나만 잘 살면 되고, 내 다음 세대가 어떻게 되들었는지 상관하지 않늗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아마도 광부는 다른 누구보다 육체노동자의 전형일 것이다. 그것은 광부의 일이 더없이 끔찍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너무나 필요함에도 우리의 경험과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로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가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잊든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p.49,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대단한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20세기 초 탄광을 직접 경험하며 노동자의 삶을 썼다. 당시에도 지상에 사는 사람들은 지하 세계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캐내는 석탄으로 살아갔다. 그럼에도 지하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어차피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동일하다고 보인다.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는데 자신의 일도 아니거니와, 자신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지식인도 인간이기에 누군가의 노동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모두가 나가떨어지고 나면, 그다음은 자신이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마르틴 뤼밀러


 책에 담긴 이야기를 읽으며 그것은 단지 경비원들의 삶이라고, 그것은 단지 일부 노동자의 삶이라고, 그것은 내 삶이 아니라고, 사회적 약자에게 눈을 돌리기는 쉽다.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라고 여기며 눈을 돌리고 누군가가 해결해줄 문제겠지라며 떠넘기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속에서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며, 비록 타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을 강요할 수는 없어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런 의문이 들 때면 이 시를 떠올린다. 모두가 타인에게서 눈을 돌려 자신만을 바라볼 때, 언젠가는 자신이 사회적 약자가 되는 순간 자신을 위해 말해줄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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