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일 퇴원했다. 수술 다음 날 정막했던 병실에서 몸만 조용히 빠져나왔다. 무사히 퇴원해 집에는 왔으나 안녕하진 못했다. 수술부위에 배액관을 달고 나왔는데 앞으로 1주는 차고 있어야 했다. 서지브라는 가슴을 조여서 당장이라도 풀어버리고 싶었다. 또 피가 차 있는 배액관을 가족들 눈에 보이기 싫어 평소 입지 않던 로브까지 걸치고 지냈다. 로브의 여밈끈이 볼일을 볼 때면 욕실 바닥에 끌려 물에 젖기도 하고 잘 때 벗어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2주 동안 샤워는 금지였다. 머리도 혼자서는 감을 수 없었다. 왼쪽팔 겨드랑이에 감시 림프선 3개를 끊었기에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고 무리하게 움직이면 수술부위가 자리 잡기 힘들다고 했다. 옷을 입을 때도 최대한 팔을올리지 않은 채 머리를 아래로 깊이 숙여 옷의 목구멍에 넣어야만 겨드랑이가 덜 아팠다.
겨드랑이 통증이 수시로 콕콕거릴 때마다 내가 유방암환자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퇴원 후 숙면을 하지 못했다. 평소 왼쪽으로 누워자던 습관 때문에 무의식으로 왼쪽으로 눕다 통증에 놀라 잠에서 깼다. 깨고 나면 다시 잠들기 힘들었다. 배액관 줄이 서지브라에 꽉 눌려 옆구리가 가렵고 아프기도 했다.
배액관은 수술 일주일 후 뺐고, 다시 일주일이 흘러 수술 후 조직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2024년 1월 3일. 모든 게 끝나거나 다시 시작되는 날.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12시 10분 진료였다. 병원에서 메시지가 왔다. '상담지연으로 40분 진료시간이 늦어집니다'
오후 1시 10분이 되어 나를 호명했고 가운차림으로 침대에 누웠다. 수술부위를 확인하고 의자에 앉았다. 선생님은 종이 위에 수술명칭을 적으며 설명했다.
"저.. 김○○님은 처음에 오셨을 때 상피내암이셨죠? 그런데 저번에도 제가 수술하고 조직검사를 해보면 결과가 달라진다고도 했었죠? "
아, 예감이 좋지 않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아 두려움이 또 두근두근 거렸다. 남편과 나는 숨죽여 듣기만 했다. 선생님은 내 눈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조직검사를 하니, 상피내암부위는 3cm고 그 안에 암조직은 2cm. 유방암 1기예요. 그런데 김○○님 암은 침윤성암, 전이가 된다는 거고. 그런데 얘는 호르몬도 음성, her2도 음성이야. 이건 뭐냐면 항암을 해야 돼요. 무조건."
사실 항암만은 피하고 싶다며 기도했었다.
"하나님, 저 항암만은 피하고 싶습니다. 방사선까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음에 평온함을 허락하신 것처럼 항암만은 피하게 해 주세요."
혼자 누워있는 시간 잠들기 전 새벽에 문득 눈이 떠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애원의 기도를 하게 되었다. 어린아이처럼 조르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의 방향을 바꾸시고 계셨다.
처음부터 상피내암으로 알았을 땐 간단히 제거만 하면 모든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고 있다가 mri결과 수술부위가 커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기분이 이상했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아무 것도 아니라더니 수술도 부분절제를 한다고 하고, 혹이 커서 생각보다 더 크게 절제한다더니 이젠 뭐? 유방암0기가 아니라구?'
그동안 기도하며 멘탈관리를 잘하고 있었는데 항암이란 말에 살얼음이 깨지며 깊은 바닷물에 금이 가듯 내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항암이란 말에 많은 걱정거리가 물밀듯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남편이 옆에서 괜찮아, 이겨낼 수 있어, 그래도 1기라서 얼마나 다행이야.... 많은 말로 다독였지만 내 마음에는 금이 쩌억쩌억 갈라지고 있었다.
엄마와 언니들에게서 차례대로 연락이 왔다. 내 병을 알고 있는 몇 명의 친구들에게서도. 결과가 궁금하고 내가 걱정되는 이들. 내 결과를 듣고는 놀라기도 하고 말을 잇지도 못하기도 했다. 나와 친한 교회언니는 대만여행 중에 전화까지 해 결과를 묻고, 또 듣더니 나 대신 펑펑 울었다. 고맙다, 나 대신 울어줘서. 이상하게 이때까지 나는 눈물이 안 나왔다. 슬프진 않은데 내가 유방암 환자로 꽤 오랜 시간 버텨야 한다는 게 싫었다. 거부하고 싶었다. 평범했던 일상을 되찾고 싶다.
내가 수술을 하고 9일 후 큰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다행히 아들의 졸업식에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