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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승민 ASM Dec 09. 2022

29. 400번의 구타 (1959)

소년의 비행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

출연. 장 피레르 레오, 클레어 모리에르, 알베르 레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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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번의 구타>는 어린 소년 앙투안의 학교와 가정에서의 생활을 보여주며 그가 방황을 겪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감독이 작가로서 영화에 적극 개입하여 주제의식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작가주의 영화의 출발을 알렸던 영화 중 하나이며, 솔직하고 독창적인 영화적 표현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만큼 영화를 감상하기 전에 그의 생애를 먼저 알고 보면 더 인상깊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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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감독의 생애를 살펴보면 1932년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할머니가 죽고 난 후에는 그의 부모가 마지못해 그를 데려오게 된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학교를 자주 빼먹었고 심지어는 가출하여 도둑질로 소년원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학교와 가정으로부터 소외된 그는 여러가지 잡일을 하면서 삶을 유지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보러 갔던 영화가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도피처였다. 15살이 되었을 때, 계부의 타자기를 훔쳐 소년원에 보내지는데 이 절망적인 곳에서 당대 최고의 평론가 앙드레 바쟁을 만나게 된다. 바쟁은 트뤼포 감독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소년원에서 꺼내주었으며, 그 후에도 트뤼포 감독을 전적으로 후원하며 그가 영화 평론가를 거쳐 감독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다. 트뤼포는 앙드레 바쟁을 진정한 아버지라고 칭할 만큼 각별하게 생각했다. 앙드레 바쟁은 1958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그를 향한 트뤼포 감독의 마음은 ‘앙드레 바쟁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감독의 유년 시절이 곧 이 영화의 줄거리와 같다고 볼 수 있을 만큼 <400번의 구타>는 그에게도 여러 의미가 담긴 뜻깊은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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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앙투안의 비행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아이의 안정적인 정서 형성을 위해 보장되어야 할 그 어떤것도 갖춰지지 않은 환경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학교의 선생님은 위협적이고 지배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윽박지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론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부정적이고 인격 모독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뱉는 태도는 지나치다고 느꼈고 자연스럽게 적개심이 생겼다. 아이들의 철 없는 행위를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수업에서 보기 싫다며 교실 밖으로 쫓아버리는 몰상식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내가 학생이라면 이런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기 정말 싫었을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앙투안의 가정에도 문제가 많았다. 가난한 형편에 맞벌이를 하는 부모와 함께 사는 그가 집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며 혼자 식탁을 차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일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앙투안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언행을 서슴지 않는다. 초반에 나타난 아버지의 살가운 태도에서 어머니와는 반대의 인물인 줄 알았으나, 영화가 진행되며 결국 앙투안에게 도움이 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실망을 느낀 인물 중 하나이다. 일과 돈 문제로 밤 늦게까지 싸우고, 심지어는 어머니가 불륜을 하다가 앙투안에게 들키기도 하는 등 복잡한 환경의 앙투안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앙투안은 어느 날 친구와 함께 학교를 가지 않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논다. 학교를 빼먹은 것에 대해 거짓말을 하기 위해 다음 날 선생님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자 급격하게 바뀌는 선생님의 태도가 위선적이고 역겹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학교로 찾아온 부모에 의해 앙투안의 거짓말이 들통나고, 그의 부모는 어떻게는 앙투안의 태도를 개선시키기 위해 같이 영화관에 가기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어머니는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털어놓으며 좋은 성적을 받으면 천 프랑을 주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한다. 앙투안은 절치부심하여 작문 숙제를 열심히 수행한다. 여기서 영화에서 가장 분노했던 사건이 일어난다. 선생님은 앙투안의 글이 발자크의 소설을 표절한 0점짜리라며 친구들 앞에서 수모를 주고 상처받은 앙투안은 다시 학교에서 도망치게 된다. 심지어 앙투안의 짝이 선생님에게 앙투안의 진실됨을 이야기하지만 선생님은 코웃음만 치고 만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방황의 정도가 심해진 앙투안은 아버지의 회사에서 타자기를 훔치다 걸려 소년원으로 가게 된다. 선생님이 색안경을 벗고 앙투안을 바라보았다면 그는 범죄자가 아니라 위대한 소설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궁무진한 발전을 할 수 있는 어린 아이에게 이토록 가혹한 언행을 일삼은 선생님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영화 중반에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말했던 앙투안은 소년원을 탈출하여 끝없이 달려서 결국 바다를 보게 된다. 그토록 원했던 바다였건만 이렇게 상처받은 마음을 이끌고 와서 봐야 했을까, 긴 여운이 남았던 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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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카메라의 시점이다. 이 작품은 앙투안이 주인공인 만큼 어른들보다 키가 작은 그의 눈높이에 맞춘 몇몇의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데 특히 어머니가 집에 늦게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을 때 부각된 다리와 구두가 침대에 누워있는 앙투안의 시선과 일치하여 내가 앙투안이 된 듯 생생함을 느꼈다. 또한 선생님과 아이들이 시내를 뛰어나가는 장면은 멀리서 버즈 아이 뷰로 촬영하여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앙투안이 친구와 함께하며 일탈을 저지르는 부분들이 영화에서 가장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던 재밌는 부분이었고, 실제로 앙투안의 표정도 가장 밝아 보여서 보기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호송차에 끌려가며 눈물을 흘렸던 앙투안의 미래가 그려지기도 해서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후반부 달리는 앙투안의 롱테이크와 정지된 이미지로 끝나버리는 엔딩이 대비되어 먹먹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을 한 소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나타나는 순간 앞으로 펼쳐질 그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을 복잡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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