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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31. 2024

하동에서 보낸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고 박경리 작가가 남긴 것들

거제에서 지내며, 첫 번째 여행 속 여행 목적지를 하동으로 정했다. 단풍이 시작되는 계절, 산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휴양림을 알아보았다. 저렴하면서 평이 좋은 곳들은 평일임에도 대부분 예약이 끝난 상태였다. 후발주자로서 부지런히 검색한 끝에 하동 구재봉 휴양림 6인실(8만 원/1박)을 찾았고, 인근 볼거리와 먹거리를 검색하며 자연스럽게 하동 여행을 준비하였다.


10월 말의 하동은 온통 녹색, 노란색, 주황색이었다. 저 멀리에는 아직 녹색끼를 벗지 못한 지리산이 펼쳐지고, 한쪽 옆으로는 추수가 끝난 노란색 논이, 다른 한쪽에는 누런 억새밭 너머 섬진강이 보였다. 자칫 밋밋할 수 있는 톤 다운된 색감 사이로 탐스러운 감이 주황색 포인트가 되어 여기저기 콕콕 찍혀 있으니, 마을 전체가 한 폭의 유화를 연상시켰다.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를 이 집 앞마당에서, 저 집 뒷마당에서, 심지어 가로수로도 만나며 최참판댁 표지판을 따라 길을 올랐다.


인위적인 드라마 세트장일 거라 생각했는데, 자연 친화적인 작은 마을이 나왔다. 모형이 아니고 실제로 돌아가는 물레방아 집에서부터 관광을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댔다. 옛 집들과 감나무, 박, 코스모스가 이루는 가을의 조화가 아름다워 마치 전래동화 속 한 장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각 집 벽에는 이곳이 '토지'의 등장인물 중 누구의 집이며, 그의 성격은 어떠하였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설명이 붙어있었다.



최참판댁은 마을의 가장 꼭대기에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자들은 높은 곳을 차지하나 보다. 주택이나 빌라에서 주인세대가 꼭대기 층인 경우가 많고, 펜트하우스도 그렇고, 회사 임원진의 사무실 역시 높은 층에 있었으니 말이다. 최참판댁 사랑채에 올라 추수를 마친 드넓은 평사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여유로운 미소가 지어졌다.

'음~이런 맛이 있었겠구나.'

옛 양반의 마음을 잠시나마 헤아려 보았다.


나오는 길에 다시 한번 평민들의 집을 구경하며, 이런 대하소설을 짓는 작가는 얼마나 커다란 뇌를 가진 분일까 생각에 잠겼다. 책 한 권을 내는 것도 엄청난 일일 텐데 20권의, 그것도 1권 당 약 400페이지 분량의 글을 짜임새 있게 집대성하는 작업이 어떤 것일지 나로선 감히 상상도 못 하겠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경이로움을 넘어 현기증이 일었다. 작가는 그 많은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생명력을 불어넣고, 그들이 조연으로서 각자의 삶을 살되 하나의 작품을 완성도 있게 만들기 위해 역할을 부여한다. 뛰어난 기억력은 물론,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동시에 큰 그림을 염두에 두는 치밀함과 섬세함을 갖추어야 가능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토지'는 하늘에서 받은 재능에 인간의 노력과 인내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더해져 나온 결과물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식당을 찾아 내려오는 길 양옆에는 가게가 즐비했다. 관광지에서 흔히 보는 기념품 가게부터 카페, 식당 등이 있었다.

'이들은 토지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구나.'         

어디 그곳의 상인들 뿐이겠는가. 지난 몇십 년간 하동군 관광수입 중 박경리 작가의 지분을 따져보면, 한 사람이 하나의 군을 먹여 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플루언서(Influencer,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였다. 본업을 묵묵히 수행하다 보니 본인은 명성과 인기를 얻고, 누군가는 그 덕에 생을 이끌어간다. 나도 잘 살고 남도 잘 살게 하는 사람, 나 역시 지인들에게 소소하게나마 긍정적 영향력을 주는 인플루언서로 나이 들고 싶다는 소망을 되새겼다. 박작가님 같은 분은 만인을 비추었던 성화이자 횃불이었다면 나는 주변을 따뜻하게 밝히는 호롱불로 만족한다. 어둠 속에선 호롱불로 충분히 밝을 테니.


화개장터, 쌍계사, 스타웨이 등을 더 둘러보고, 참게 매운탕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하동 곳곳에서 벚나무가 터널을 이룬 도로를 달리며, 벚꽃 피는 계절 이곳을 한번 더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가 되면 주황색 감대신 하얀 벚꽃이 더해져 하동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느껴지지 않으려나. 아우 상상만 해도 행복해진다.

  

대작가가 남긴 것들에 감동하고, 대자연이 만든 풍경과 색감에 감탄하며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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