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선 커 보이던 게 나오면 별 것 아닌 게 된다
학생들의 성적, 직장인의 승진, 자격지심
천천히 일상을 살듯 한달살기 여행을 하던 우리 부부는 최근 3주간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거제도에 거점 숙소를 두고 주 초가 되면 경남/전라도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온다. 짧게는 1박 2일에서 길게는 3박 4일까지 머물다 온다. 주 후반에 지인 혹은 가족이 우리 집에 방문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들이 돌아간 후 다음 주가 되면 우리가 다시 여행을 떠나는 식으로 3주째 살고 있다.
지난주 우리 집 방문객은 친정아버지셨다. 사회활동 한창이어야 할 딸네가 직장까지 그만두고 긴 여행을 떠날 거라 말씀드렸을 때, 아버지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돈은?" 매우 현실적이며 직설적인 단 한 가지만 물으셨다. 준비해 간 대답을 드리니 "그래라." 응원과 포기 중간쯤인 애매한 대답을 뱉으셨다.
고현터미널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숙소로 오던 길, 숙제 검사를 받는 아이의 심정으로 긴장이 되었다. 집을 둘러보신 아버지의 반응은 예상보다 더 좋았다.
"집 참 좋구나. 서울에서 이런 집에서 살려면 최소 00억은 줘야 할 텐데..."
서울에서 25년이 넘은 아파트에 사시는 아버지가 보시기에 거제의 숙소가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사는 모습을 직접 보니 마음이 놓인다 하셨고, 무엇보다 딸 얼굴이 맑고 밝으며 건강해 보여 기분이 좋다고 하셨다.
"00아, 서울집 처분하고 이런 거 하나 사. 남는 돈은 투자해 놓고 그걸로 살면 되잖아. 놀러 다니면서 좋은 것 먹고 좋은 생각만 하며 걱정 없이 살아."
어쩌면 당신의 염원을 담은 말씀이었을지 모른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나이 들면 강원도 산으로 들어가 살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서울을 떠나지 못하셨고, 어느덧 변화가 싫고 병원이 멀어지는 게 두려운 연세가 되었다. 싫든 좋든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생활비를 아껴가며 여생을 보내야 한다.
20대 후반 허리띠 졸라매며 시작했을 아버지의 서울살이는 70대 후반이 되어도 넉넉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산은 크게 늘었을지언정 마음의 여유는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다는 모순만 남겼다.
아버지 말씀이 마음에 남아, 거제의 부동산 시세를 알아보았다. 조선업이 활황이던 시기 거제의 집값이 비쌌다고 들었는데 현재 산업 성장이 둔화되며 지역 부동산 시세도 많이 떨어진 것 같다. 방 4개와 화장실 2개, 커다란 팬트리 공간과 드레스룸을 갖춘, 현재 내가 지내는 아파트가 1억 중후반대로 매물이 나와 있었다.
여행을 마친 후 서울로 돌아간다면 거진 20년 동안 모은 돈을 집으로 깔고 앉은 채 남편은 생활비를 벌고, 나는 아끼고 쪼개며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질병 퇴사 후 몇 년 동안 겪은 외벌이 가정의 삶,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남편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이고(이 나이에 원하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을 테고), 나는 지하철 3 정거장 거리의 저렴한 식자재 마트에서 후다닥 장을 봐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30분 이내 환승하며 차비 아꼈다고 좋아하는 주부로 돌아갈 것이다. 매일 가계부를 쓰며 얼마를 썼고 얼마가 남았나를 체크하며, 부디 이번 달 생각지 못한 돈 들어갈 일이 없기를 바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 그 삶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뭘 바라고 이렇게 동동거리는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의문에 답을 못 찾아 답답해질 것 같다.
아버지 말씀대로 서울 집을 처분하고 지방에서 살면서 잔액으로 배당주를 매수하면, 배당금으로 우리 두 사람 생활비는 나오지 싶다. 원하는 만큼 일을 하며 노동 수입까지 더한다면 여행비와 노후를 위한 저금도 가능하다.
서울에서 살 땐 더 좋은(비싼) 동네로 입성하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 나올 때가 있었다(사실, 잦았다 ㅠㅜ).
옛 친구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너 어디 살아?" 질문이 나오면 괜스레 대답이 기어들어가곤 했다. 친구가 학창 시절에 살던 동네 근처에 산다고 대답했을 때에는 부러움이 일었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의 집값은 어느덧 내겐 쳐다보기 힘든 곳이 되어버렸으니까. 친구가 공부는 잘하지 않았지만 남자를 잘 만났나 보네 이런 못난 생각이 스쳤던 것도 부끄럽지만 인정한다.
여행 후 앞으로 서울을 벗어나겠다는 결심이 서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 안에 있을 때는 크게 보이는 무언가가 나오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뀔 때가 있다. 직장에 다닐 때 승진인사가 있는 날은 인근 술집 매상이 오르는 날이었다. 누군가를 축하하기 위해 혹은 위로하기 위해 술자리를 가지며, 임원이 된다는 게 엄청나게 중요하고 큰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퇴사 후 조직을 나와 보니 어느 회사의 임원, 실장, 팀장이 생각만큼 엄청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가끔씩 들려오는, 직함과 자리 때문에 여전히 스트레스받고 질투하고 슬퍼하는 그 안의 사람들 이야기에 밖의 사람으로선 '그게 그럴 일인가' 안타까움이 인다.
학생시절엔 성적이 그러했다. 성적이 떨어진 것으로 죄의식을 느끼기도 하고, 울고 불고, 질투받고 시기했다. 마흔이 넘은 시점, 나와 주변을 보면, 성적과 성공의 상관관계는 그리 높지도 않은데 말이다.
사는 동네와 집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 안에서 살 때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타인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열 올리고, 스스로 못난 사람이 되고, 삶의 목표가 비싼 동네 아파트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해롭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말이 2000년이 훨씬 지난 현대인 마음에 촌철살인이 되어 꽂힌다.
'어디'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염두에 둔 채,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고 나의 내면이 필요로 하는 것을 욕망하며 살아가고 싶다. 우리 각자와 우리네 삶은 타인과 비교하며 괴로워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시간인데 허무한 데에 시간과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오늘 이 시간 더 행복하고 충만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