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바쁜 12월이 지나갔다. 아니 아직은 지나가지 않았지만 공휴일을 제외한 12월 29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 휴가를 낸 나는 12월 23일 오후부터 2020년의 업무는 끝이 났다. 이미 많은 사람이 휴가를 떠난 상태이긴 했지만, 부재중 메시지를 작성하면서 새해 복 많이 받고 2021년에 만나자는 문구를 적으니 기분이 묘했다. 짧았기에 더 정신없이 바빴던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일들이 월말 그리고 연말에 맞춰서 딱딱 끝나면 좋겠지만 내가 하는 일은 그 마감을 맞추기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너무 많다.
12월, 크리스마스 그리고 연말연초여서 명절 분위기여야 하지만, 한국처럼 제네바의 코로나 상황도 심상치 않은 듯하다. 11월까지는 매일 스위스 TV의 7시 30분 뉴스를- 여기는 우리나라 뉴스데스크 같은 프로그램이 7시 30분에 시작을 한다- 열심히 챙겨보면서 하루에 확진자가 얼마나 나오는지, 칸톤의 병원 상황은 어떤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12월 들어서면서는 어차피 재택근무는 계속이고, 레스토랑은 문을 열었다가 언제든 닫고- 제네바는 12월 23일 저녁을 기점으로 모두 닫아버렸다- 모일 수 있는 사람 수는 최대한 5명이기에, 달라질 건 별로 없어서 뉴스와 신문 보기를 그만뒀다.
특별히 살 건 없지만, 그냥 가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바스티옹 공원의 크리스마스 마켓도 올해는 열지 않았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 일요일 오후에 가서 크리스마스 전등 장식을 구경하면서 뱅쇼를 마시는 게 나의 작은 의식이었는데, 올해는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오늘 고향에 갔다가 돌아온 친구와 전화를 했는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최대 5명이 모이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온 가족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친구는 3형제 중 막내이고, 80이 넘으신 아버지와 그 여자 친구, 조카 등등을 포함하면 15명 정도 되는데 다 함께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참 어려웠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설날을 집에서 혼자 보내는 것이어서 주변 사람들이 혼자 있는 나를 어여삐 여겨서 걱정을 많이 하는데 크리스마스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나에게는 외롭거나 한국이 그리워지는 마음은 별로 들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준비로 바쁘고 스트레스를 받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크리스마스를 챙기지 않아도 되는 내가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라면, 예루살렘에 살 던 해에 크리스마스이브에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에 갔던 것이다.
그래도 제네바의 식당이 문을 닫던 12월 23일 저녁에 마지막 의지를 불태워 일부러 예약을 해서 '크리스마스 디너'를 먹으러 레스토랑에 갔다. 그리고 생굴, 참돔 구이, 화이트 와인, 크렘뷸레 디저트까지 오랜만에 풀코스 식사를 하면서 명절 기분을 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슈퍼나 백화점에 사람이 정말 많았다. 오랜만에 줄을 서서 슈퍼에 그리고 백화점에 입장하는 걸 보았다. 오후에 슈퍼에 가니 채소나 과일 같은 신선식품은 이미 다 팔리고 남아있는 게 없었다. 다 먹지 못하겠지만 샴페인도 한 병 사려고 했는데,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모든 가게들이 26일에도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12월 26일을 크리스마스 이후의 boxing day로 생각하고 못 산 건 토요일에 사야지 했는데, 코로나 덕분에 26일은 동네 담배가게조차 문을 닫았다. 애연가인 내 친구는 버스를 타고 프랑스에 가서 담배를 사 왔다...)
그리고 연휴 동안은 다시 넷플릭스를 신청해서 못 봤던 드라마들을 열심히 보았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언제나 요리가 귀찮은 나이지만, 김밥, 잡채, 어묵탕, 스테이크 등등 안 하던 요리도 해서 차려서 먹었다. 가만히 않아 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벽의 기름때가 거슬려서 청소도구를 꺼내 열심히 닦아 주었다. 쉬는 날의 시간은 언제나 쏜살같이 흐른다는 걸 느끼면서 말이다. 고독 사하는 거 아니냐고 주변에서 걱정하던, 코로나 시대 크리스마스 연휴는 나름 알차게 잘 지나갔다. 그리고도 쉴 수 있는 1주일이 남아 있어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