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Eiger Express
2021년 5월.
융프라우요흐에 다녀왔다. 사실 어릴 때 배낭여행을 할 때도, 스위스를 가끔 올 때도, 작년에 그린델발트에 갔을 때도 융프라우요흐에 올라갈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비싸기도 하고, Top of Europe'이라는 수식어로 외국사람들에게 마케팅을 영리하게 잘해서 유명세를 타는 것도 같다. 무엇보다 내 주변의 스위스 사람들 중에는 거기 가 본 사람이 없고, 갈 생각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엄마가 오셨고, 한국 관광객들에게 융프라우요흐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하니 이참에 가보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길, 스위스 관광은 날씨가 반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한다. 나 역시 스위스에 살게 되면서 날씨에 대한 집착이 많아졌다. 원래 5월은 날씨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 편인데, 지난 3월과 4월이 봄 날씨 답지 않게 따뜻하고 햇빛이 많이 나더니 올해 5월이 되니 춥고 비가 많이 온다. 그래서 융프라우 지역에서 1주일을 머물렀는데, 햇빛이 쨍하게 났던 건 단 하루뿐이었다.
나는 흐린 날씨에 전망대에 가는 것은 돈 낭비라 생각하기 때문에, 날씨가 좋지 않다면 1인당 왕복 100 프랑(그것도 스위스 철도 반값 할인카드 적용)은 쓸 마음이 없었다. 스위스 친구들에게 이번에 융프라우요흐를 가볼까 한다고 하니, 그 비싼 걸 왜 굳이 타고 가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차라리 등산을 해서 뮈렌이나 맨리헨에 가면 융프라우를 더 잘 볼 수 있다면서. 그래서 라우터브루넨에 머물던 1주일 내내 날씨와 웹캠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좋은 시기를 기다렸다.
아랫동네인 라우터브루넨에는 여전히 잔뜩 흐렸지만 웹캠으로 3400미터 전망대를 보니 믿기 어렵게도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스위스 사람들이 겨울에 아랫동네 날씨가 흐리면 산에 올라가서 푸른 하늘을 본다고 말하더니 정말이었다. 주무시는 엄마를 급하게 깨워서 융프라우 가는 8시 37분 첫 기차를 탔다.
융프라우 가는 길은 그린델발트에서 클라이네 샤이덱으로 올라가는 기차와 라우터브루넨에서 벵엔을 거쳐 클라이네 샤이덱으로 올라가는 기차 그리고 작년 12월에 새로 개통했다는 새로운 아이거 익스프레스 곤돌라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나는 라우터브루넨에 숙소를 잡았고 고령이신 엄마가 고도에 천천히 적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라우터브루넨에서 기차를 탔다. 작년 여름에는 사람으로 꽉 찼던 기차가 올라갈 때는 탄 승객이 10명 정도밖에 없었다. 그나마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다른 승객들은 내리고 융프라우 가는 기차를 타는 사람은 엄마와 나 그리고 꼬맹이 둘이 있는 스위스 가족 4명뿐이었다. 원래는 올라가는 풍경이 설산과 녹지 그리고 큰 나무들로 예술인데 흐린 날씨와 아직도 녹지 않고 쌓인 눈 탓에 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2량의 기차가 단 6명 만을 태우고 출발했다- 아이거글레쳐로 5분 정도 이동했다. 그리고 나니 융프라우요흐로 가는 기차로 환승할 수 있었고, 그린델발트에서 아이거글레쳐까지 바로 곤돌라를 타고 온 사람들과 합류했다.
성수기 때는 좌석 예약비를 내야 할 만큼 인기라고 하더니, 평일 첫 융프라우요흐 기차는 그리 붐비지는 않았다. 25분 정도 긴 터널을 지나니- 사실 나는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유로스타처럼 검은 터널만 지나갔다-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했다. 첫 차여서 우리가 도착하니 전망대도 막 문을 여는 듯했다.
융프라우요흐는 전망대만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영상물이나 얼음 조각이 있는 얼음터널, 아기자기한 전시물도 있어서 혹여 날씨가 안 좋아서 설산을 볼 수 없다고 해도 사람들이 비싼 돈을 올라오게 만들고 내가 'Top of Europe'에 왔다는 인증숏을 찍을 수 있는 무궁무진한 기회가 있었다. 왜 이 곳이 특히 아시아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이해가 되었다.
전망대로 나가니 구름 한 점 없는 눈부신 새파란 하늘이 보였고, 설산은 웅장한 위용을 자랑했다. 잘 아는 풍경이지만 그래도 압도적이었다. 밖의 날씨가 영하 10도나 되어서 오래 있을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쉽게, 편하게 단숨에 3400미터까지 올라와서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를 본다는 게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또 관광객들이 많은 성수기에는 줄 서서 기다려 들어간다던 전시관 그리고 전망대 역시 사람이 거의 없어서 무서울 정도로 한산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신라면 컵라면 역시, 12프랑 (만 오천 원 정도) 한다는 가격표는 있었지만 가게는 문을 닫았다.
2시간 정도 천천히 여유 있게 구경을 하고, 내려갈 때는 그렇게 광고를 많이 하던 아이거 익스프레스 곤돌라를 타 보기로 했다. 실제로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곤돌라를 타고 오고 가는 듯했다. 곤돌라는 아이거글레처에서 그린델발트까지 20분 만에 한 번에 내려가니, 기차를 2번 갈아타고 1시간 넘게 걸리는 기존 루트에 비해서는 확실히 시간 절약이 되고, 풍경을 파노라마 롤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듯했다. (가격은 기차와 거의 비슷하다. 할인받아서 편도 46프랑 정도)
30인승 곤돌라이고 좌석번호까지 적혀 있었지만, 사람이 없어서 그 큰 곤돌라는 5명이 타고 내려왔다. 조금 더 기다리면 엄마와 둘이 타고 내려올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건 좀 무서웠다. 속도가 정말 빠르고 기차와는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기는 했다. 시간적 여유가 없는 관광객들에게는 꽤나 매력적인 옵션이 될 것 같다. 나는 그래도 덜덜거리면서 천천히 올라가는 톱니바퀴 기차를 더 좋아하지만 말이다.
작년에 맨리헨 갈 때만 해도 공사판이었던 그린델발트 터미널은 지금 새롭게 단장을 해서 상점과 식당도 입점한 근사한 터미널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관광객들을 기대하고 이렇게 막대한 투자를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거의 개점휴업 상태니 좀 안타깝기도 했다.
절대 갈 일이 없을 거라던 융프라우요흐도 코로나 덕분에 또 엄마 덕분에 가보게 되고, 조용하고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산의 위용만 본다면 나는 여전히 마터호른이 더 좋지만 그래도 한 번은 가 볼만한 곳인 듯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설산을 보는 게 목적이라면 비싼 돈을 들여 융프라요흐를 가기보다는 뮈렌이나 맨리헨 정도에서 보는 게 풍경을 감상하면서 걸을 수 있어서 더 나은 선택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