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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 Jul 14. 2021

제네바에서 본 한국문화

제네바는 국제도시이고, 한국분들 역시 많이 사시는 것 같다. 관광객이 거의 없는 요즘에도 호수를 걷다가도, 슈퍼에서 물건을 살 때도 한국말이 종종 들리니 말이다. 하지만 소심하고 사회성이 부족한 나는 한인회에 가입하지도, 한인교회에 출석하지도 않고, 한국말이 들려도 내가 먼저 다가서서 인사를 건넬 용기도 없다. 그래서 제네바에 온 지 3년이 다되어 가지만 아는 한국사람은 안타깝게도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곳에도 한국 문화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아래는 일상에서 내가 발견한, 아주 주관적인 한국문화의 조각들이다.  


1. 도서관에서

제네바 도서관(다른 스위스 대도시의 도서관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나라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도서관에서 돌아다니다 공지영 작가의 '봉순이 언니'가 불어로 번역된 걸 발견했다. 프랑스는 다른 나라 작가들의 작품을 불어로 번역해서 읽는 게 다른 어떤 나라보다 발달했다고 듣긴 했는데, 실제로 이렇게 한국적 정서의 작품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게 신기했다. 사실 어릴 때 그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불어로 읽어도 신기하게도 1970년대 우리나라 상황들이, 서울 중산층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 이후에도 찾아보니 공지영 작가 작품만 해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도가니'까지 우리 집 앞 도서관에 있었다. 물론 그 이후로는 한국소설을 프랑스어로 읽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스위스 친구가 한국말로 '제주 해녀'에 관한 소설을 읽었다면서, 한국이 그런 복잡한 역사가 있는지 몰랐다며 본인이 읽고 있던 책을 보여줬다. 그 친구는 한국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가 그 책을 읽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 The Island of Sea Women'이라는 제목의 책을 역시나 시내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저자는 재미교포인데, 제주에서 나고 자란 두 해녀의 일생을 일제강점기부터 제주 4.3 사태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관통하며 담담하게 그려냈다.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는 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지난주 집 앞 도서관에 갔다가, 추천 신간으로 전시되어 있는 '한국인의 생활방식'이라는 책을 호기심에 빌려왔다. 저자는 한국인이고, 원문은 영어인데 프랑스어로 번역을 한 책이다. 꼼꼼히 읽지는 않고 대충 훑어봤는데 심층적인 분석이 있다기보다는 아주 일반적인 정보를 그림과 함께 전달하는 책이었다. 그중에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인 '눈치'에 대해 'l'art du nunchi'라는 제목으로 설명해 주고, 한국인들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 '화이팅', '짱이다', '쪽팔려' 등등을 발음과 함께 어떤 경우에 쓸 수 있는지를 적어 놓았다. 입문서로는 나쁘지 않은데 한국인인 내 입장에선 수박 겉핥기 정도에 지나지 않아 좀 아쉽다. 일본에 관해서는 정말!! 압도적으로 많은 문학적 가치가 있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한국에 관한 책이 도서관 추천 신간으로 오른다는 데 자랑스럽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얼른 반납해야겠다.  




2. 공원에서

역시나 집 앞 공원을 산책하는데, 어디선가 '하나, 둘, 셋, 넷'이라는 한국말이 계속 들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건가 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한 무리의 태권도 수련팀이 공원 잔디밭에서 스트레칭과 발차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외국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하면, 그럼 넌 태권도 유단자냐고 물어봤었는데 나는 태권도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태권도는 한국어로 한다더니 사범으로 보이는 분이 정말 불어 중간중간에 차렷 경례 그리고 숫자 세는 걸 꿋꿋이 한국어로 하셨다.  제네바에도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있는지 몰랐는데, 열명도 넘는 사람들이 열심히 발차기를 하는데 신기해서 구경을 했다. 내가 한참을 서서 보고 있으니 사범님이 나에게 한국사람이냐고 물어보셨다. 그렇다고 하니, 너는 태권도 잘하겠네? 와서 같이 태권도하지 뭐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사범님은 프랑스 사람인데 취미로 태권도를 가르치신단다. 여하튼 한국사람은 한 명도 없어 보이던데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이후로도 태권도 수련단 무리는 종종 공원에 나타났다.)


3. 텔레비전에서

영화 기생충은 이미 2019년 칸에서 상 받을 때부터 유명한 영화였고, 나도 제네바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주변 사람들도 작년까지 종종 이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 부자나라 한국에 그렇게 반지하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정말 있느냐, 그 영화가 실제로 한국 상황을 반영하고 있느냐 이런 걸 물어보곤 했으니 말이다. 또 'parasite' 라는 단어 자체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이 아닌데, 어쩌다 그 단어가 나오면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영화 기생충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2주 전 어느 주말, 기생충을 RTS (스위스 국영 텔레비전 방송)에서 프랑스어로 더빙해서 방영하는 걸 보았다. 이미 본 영화였지만, 한국으로 말하자면 '주말의 명화'로 기생충이 방영된다는 게 나에게는 놀라웠고 감동이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거룩하게 다시 기생충을 시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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