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chelistic Oct 24. 2023

P 100% 얼렁뚱땅 노마드의 성인 ADHD 극복하기

전형적인 ENTP 베짱이가 30살에 꿈꿔보는 정리된 삶

나는 10년 넘게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는 디지털 노마드이다. 삶이 넉넉한 건 아니지만 딱히 걱정 근심이 없고 간간히 벌어먹고 살아가면서 소소한 행복을 챙기고 있다. 요 근래 내 피드에 자주 노출되는 콘텐츠들이 있는데 성인 ADHD에 관한 영상들이다. 예를 들면, 이런저런 증세가 있다면 당신은 ADHD를 갖고 있습니다. 같은 영상들에 이어 슬픈 배경음악과 함께 저는 사실 성인 ADHD를 갖고 있습니다. 와 같은 콘텐츠들. 나는 MBTI도, 별자리도 혈액형도 매우 잘 맞아 나를 극적으로 잘 표현해 주는데, ADHD관련 영상을 볼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이 글을 찾아온 당신이 ENTP에 O형에 사자자리라면 내 말에 심히 공감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분주하고 산만한 어린이였던 나는 맞벌이 부모님이 일을 나가시고 집이 비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 안방은 내가 다스리는 작은 왕국의 수도였고 거실은 다른 세계로 떠나는 모험의 길, 각 방들은 저마다 다른 세계관을 붙여줬다. 그렇게 집안 곳곳을 다니면서 상상의 세계들을 만들고 붙이는 게 가장 재미있었다. (물론 동생도 있었지만 동생은 방구석에서 조그만 병정 인형들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반경이 겹치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만든 세계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를 보내다 보면 부모님의 귀가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면 오늘 벌린 난장판은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싶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막판에 급하게 옷장 속으로 밀어 넣곤 했는데 결국은 제때 정리하지 못해 매일같이 부모님께 혼나기 일쑤였다. 


 좀 자라고 나서는 잔소리가 싫어서 집을 어지르지 않기 위해 해가 질 때까지 동네 곳곳을 누볐다. 매일 똑같은 놀이에는 실증을 느껴 새로운 놀이들을 만들어냈는데 그 덕에 항상 동네 친구들이 나를 따라다녔다. 언뜻 보면 골목대장에 엄청난 인싸인 것 같지만, 그때그때 놀이할 때만 즐거우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형성된 친우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을 딱히 느끼지 못했고 결국엔 항상 혼자 편해 아싸로 돌아왔다. 학창 시절 가방엔 일 년 내내 전 과목 책이 다 들어 있었고, 학교에서 나눠준 가정 통지서는 가방 속에서 다른 책들에 눌려 찢기고 바스러져 있다가 다음 학년 책을 받을 때쯤에 겨우 구제되어 쓰레기 통으로 직행하곤 했다. 학기 초나 시험기간에는 스케쥴러를 사 와 첫 페이지에 공부 계획만 번듯이 짜놓고 실행하지 않아 항상 벼락치기였고 한두 장 끄적이고 만 그 노트들은 엄마의 가계부로 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적은 잘 나와서 어떻게 대학까지 갔지만, 지금 돌아보니 정말 되는대로 막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미루지 말아야지 수없이 후회하고 다짐하며 자괴감에 빠졌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새 아침과 함께 슬픔은 잊고 다시 만사 태평한 상태로 돌아가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나를 보면서 아 나는 그냥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구나 하고 감히 변화를 시도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나는 죽어도 개미는 못되겠고, 돈은 많이 못 벌고 이름은 못 남겨도 베짱이로 살겠구나 하는 것을 이미 직감했다.


주의력 결핍/과잉행동 장애(Attention Deficit/Hyperactivity Disorder, ADHD)는 아동기에 많이 나타나는 장애로, 지속적으로 주의력이 부족하여 산만하고 과다활동, 충동성을 보이는 상태 라고 한다. 이 아동기 장애를 떼어버리지 못한 채 성인이 된 나는 이모양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 행동들을 한마디로 정의해 주는 고마운 병명이라고 해야 하나. 이젠 내 행동에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저 ADHD 있어서 그래요. 하면 한방에 상황정리가 끝나 편한지도 모르겠다. 


다들 집이 그립다는 유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유독 적응이 너무나도 빨랐고 살아가는 매일이 즐거웠다. 처음 보는 문화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정 가운데 항상 허기져있던 내 호기심이 채워졌고 내 마음엔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설렘이 장착되어 매일밤 잠드는 순간까지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20대의 나는 매일같이 반짝반짝 빛났다. 매일이 쏟아지는 다채로운 빛깔의 삶들에 취해있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을 노마드로 이리저리 떠돌면서 살다 보니 어느새 30대에 접어들었다. 


30대라고 달라진 건 없었다. 지난겨울만 해도 모로코에서 서핑을 즐겼고 봄에는 스페인에서 공부를 하고 춤을 배웠다. 여름은 호주에서 (호주는 겨울이지만) 디자인과 서핑을 하며 보냈다. 호주에서 한국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듣고는 대부분이 놀라며 부럽다는 의견 반, 그리고 반은 이제 나이도 있는데 정착 생각은 없냐며 다소 부정적인 의견을 비추었다. 디지털 노마드로 내가 일하고 싶은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수 있는 자율권을 손에 쥐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건 나 같은 사람도 그나마 경제 활동을 가능케 해주는 감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브렉시트와 코로나를 직격으로 맞고 인생 한방이라는 것을 두 겪고서 예상치 못했던 루트로 30대에 접어든 터라 내 불안정한 삶에 대한 회의를 (조금은?) 하고 있었고 정착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피워내고 있던 나였기에 전에는 흘려들었을법한 어른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따가운 조언도 귀담아 들었다. 


 호주 생활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리스와 이태리에 들렀다. 피크 시즌이 지나 조금은 한적한 아름다운 섬 미코노스에서 모처럼 베짱이처럼 휴가를 가졌다. ADHD를 가진 100% P가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는 데는 아무 계획 없는 즉흥 여행이 답이다. 모든 현실의 걱정은 잊고 3일 동안 먹고 자고 휴양만 했다. 지중해의 햇살과 바다 음식 모두 완벽했다. 그리고 돌아온 아테네. 저가 호텔에 배낭을 풀고 산책을 나섰다. 고즈넉한 유적들이 있는 낭만의 거리를 상상했는데 오래된 폐허들 사이에 가득 찬 자본주의 색채로 가득 매워진 화려한 거리들과 잔뜩 차려입은 차림으로 만취해 길거리에 곯아떨어진 젊은이들, 그 바로 몇 골목 옆을 지나자 펜타닐에 사지가 마비되어 유적의 조각상들처럼 거리에 박제된 사람들을 보며 인류란, 인생은 뭘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라는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생각했지만 딱히 어떤 방향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뭔가 정착이란 알 수 없는 일을 해볼까 싶은데 쉽지 않게 느껴진다. 곳곳에서 전쟁이 터져나오는 시기에 좀처럼 원하는 비자를 취득하는 것도 쉽지 않고 준비할 것들이 많은데 그 과정이 생각만으로도 아득해 멀미가 났다.


계획을 하자니 머릿속이 복잡하고 미뤄진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지금도 이리저리 속에서 나오는 말들을 정리해 보고자 이렇게 끄적여 보지만 이 또한 결국 의식의 흐름에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을 적는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잡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다시 집중해 보자면..


내 일상을 이미지로 묘사해 보자면 집안을 오픈된 택배박스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 상태 같다. 너무 많아 정리할 엄두도 나지 않는 상태로 이걸 열었다가 저걸 열었다가 간만 보고 방바닥 가득 그대로 널어놓은 모양. 이를 외면한 채 계속 새로운 택배만 열어보면서 평생을 살다 보니 가끔은 이 사태를 직시하고 엉망진창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괴로움에 잠긴다. 특히 SNS 인스턴트 콘텐츠들에 푹 빠져 하루를 빼앗기고 나면, 그 감정이 더 악화되는데.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내게 이는 천국의 문이자 지옥의 문과 같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들에 정신이 팔려서 이것저것 흡수하다 보면 보다 보면 하루가 다 가있다. 그럼 다른 일상의 일들은 손대지 못한 채 또 하루가 가고 또 내일로, 그다음 주로 그러다 보면 몇 달이 지나있음을 발견할 때 찾아오는 그 감정은 최악이다. 나는 그대로인 채로 시간만 흘러간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끔 내 산만함이 넘쳐날때는 작고 단순한 일과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내 성격상 스스로를 제한하고 강제한다면 더 깊은 좌절에 허우적 댈거란걸 알기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내 사고에 맞는 해결 방안을 고안해냈다.


 그 방법이란 단순히 내 하루를 기록하는 것이다. 스케쥴러로 일정을 계획을 하거나 하루를 마감하는 일기를 적는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기 급급한 내게 일어날 일을 계획하는 것이나 지난 일에 대한 일기를 쓰는 것은 매우 지루한 일정이기 때문에, 현재의 내 삶을 30분 단위로 기록하는 것을 선택했다. 작업을 하기에 짧은 시간 같지만, 주의 지속 기간이 짧은 내게 1시간은 너무 길어서 30분이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하나를 하면서도 여러가지로 튀어다니는 내 생각을 붙잡기 위해 각 업무들에 짧은 제한 시간을 두어 순간적으로 높은 강도의 집중을 쏟아내 시간 안에 그 업무를 해결하고 난 다음,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정해놓은 일을 제때 맞춰한다는 게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내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런 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아주 짧고 비정형적인 방식으로 나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 줄로 남길 때도 있고 그림으로 표현할 때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활동들을 제한하고 주어진 일을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하는 일들을 기록을 하는 것이기에 마음이 편안하다. 30분-1시간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기록을 하니 충동적인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이 쉬워졌다. 다음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툭하면 상상의 나래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몇 시간을 헤매는 나이기에 자꾸 적으면서 현실로 강제 복귀 시키고 내가 그 일정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을만하면 일깨워주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30분 간격으로 아래의 활동들을 했다.


- 방청소. 빨래를 세탁기에 넣었지만 돌리는 건 깜빡했다. 이건 이제 글 쓴 후에 돌려야 한다.

- 아침식사 + 듀오링고 앱으로 언어공부. 초록 부엉이의 열렬한 서포트 덕에 26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데 성공했다. 아마 내 생에 가장 큰 규칙적인 업적일 것이다. 365일을 향하여.

스페인어 공부 30분. 유튜브에서 새로운 채널을 찾았다. 미디어에 노출하는 것이지만 스페인어는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자질 중의 하나로 유익한 노출이다. 프렌즈를 스페인어 더빙판으로 보는 것이다. 다들 프렌즈로 영어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스페인어 공부를 하는 웃픈 상황이다. 아무튼 그렇다. 

- 밀린 메시지 읽고 답장하기. 나는 웬만하면 급하지 않는 메시지들은 잘 읽지 않고 내버려 두는 습관이 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누구로부터 언제부터 와있는지는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점점 쌓이게 되면 은근 스트레스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몰아서 이메일과 메시지에 답장한다.

- 글 쓰기. 글쓰기는 생각 정리에 도움이 된다. 더욱이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영감이 될 수 있다면 하루 30분을 투자하는 가치로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엉망인 글을 누가 읽고 뭔가를 얻을 게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렇게 25분간 활동을 하고 5분간 생각 정리를 한다. 지난 25분 동안 내가 뭘 했는지. 생산적이었는지. 오늘 해야 할 일들은 어느 정도 처리했는지. 그리고 남은 일들은 뭐가 남았는지 확인해 본다.


오늘 할 일로 남은 활동들로는 

- 웹사이트 프로젝트 매뉴얼 작성 및 전달

- 거주 증명 서류 프린트

- 비자 취득 서류 작성 (오늘 50프로)

- 친구와 저녁식사

- 스윙댄스 클래스 


이렇게 쭉 적어보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도 않고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면서 딴 생각 할 여유가 없다보니 SNS를 켜서 지루함을 쫓고 싶다는 충동도 사그라든다. 그리고 이런 업무들이 있다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산책하기 디저트 사먹고 오기 등등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재빨리 다음 30분을 할애해서 즐거운 일을 하다가 주어진 아젠다로 돌아오면서 지루함을 방지한다. 전에는 휴식하면서도 쌓인 일과들을 생각하면 어깨가 무거워서 쉬는게 쉬는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기록을 시작한 후에는 일이 밀리는게 현저히 줄어들면서 마음의 짐은 덜고 마음껏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할때 기록을 쭉 보면서 오늘 하루 잘 살아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때 뿌듯하다.  


ADHD라서, P라서 남들이 못하는 일에 선뜻 도전하고 저질러 버리는 건 고수다. 그래서 내 삶은 다채롭고 매일이 새로워 즐겁지만, 이젠 변하지 않는 굳건한 뭔가를 세우고자 한다. 내 쉼터를 마련하고 언젠가는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착이란 단어는 듣기만 해도 거부감이 들고 그 과정을 생각하면 숨이 막힐 것 같지만 그 정착의 삶 가운데서도 이렇게 소소한 생각과 창작으로 지루할 틈 없는 일상을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응원해 본다. 


결국 나는 평생 나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것이다. 그래서 나의 밉고 싫은 모습들을 외면하고 숨기는 대신 더 파악해서 그 단점도 장점으로 바꿀수 있는 방법을 차근차근 연구해 나가고자 한다. 나도 지금 나 자신을 연구중이고 (아마도 평생을 연구해야할 대상이겠지만) 그렇게 내 삶을 잘 가꿔나가고 언젠가 정착한 그 곳에서 주어진 삶을 잘 마무리해내서, 훗날 자녀들에게 "그렇게 노마드 할머니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먹고 잘 살았답니다" 라는 미담으로 내 이야기를 전해 줄수 있도록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사내괴롭힘, 기다림 끝에 찾아온 악인의 종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