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리스 밀러를 비롯한 비평가들이 <댈러웨이 부인>에서 서양 문학의 전통과 모더니즘을 동시에 찾을 때, 그들은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죽은 자의 부활로서의 반복’을 발견한다. 밀러에게 울프의 스토리텔링 방법론은 ‘기억 속에서 과거를 반복하는 작업’으로, 소설의 등장인물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서로 다른 인물과 마음의 연결을 도모한다. 울프가 차용한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 양식은 이들의 마음으로부터 ‘집합적 마음’이라는 전지적 화자를 탄생하게 하며, 화자는 간접화법을 통해 인물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본다.
한편으로 울프가 의지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담론은, 프루스트를 필두로 하여 19-20세기에 여러 지성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주제로서 울프 또한 시간을 단방향적인 흐름으로 이해하는 전통에서 벗어나 본인의 스토리텔링 방법론을 통하여 과거와 현재, 미래의 상호작용을 제시한다. 이 지점에서 울프는 근대의 전통과 고대의 전통을 융합하며 새로운 모더니즘으로 나아간다.
근대 미술은 고대 그리스 미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초시간적 본질의 묘사를 추구하는 근대 미술은 그 자체로 고정된, 무한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정경에 시간적 사건을 압축하는 ‘분할적 방법’을 사용한다. 한편, 로마 시대부터 이어진 서양미술의 전통은 본질적으로 시간적인 현상을 시간, 공간적 수단으로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움직임 아래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일을 하나의 무대, 풍경에 묘사하는 ‘연속적 방법’이 널리 활용되었다. <댈러웨이 부인>은 인생을 보여주는 단 하루를 선택하여 개인의 삶을 초월하는 인간 보편의 가치를 보여주는 한편, 초시간성에 도달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서사를 사용하는 동시에 회상을 통하여 시각적 이미지를 끊임없이 환기하며 근대 조형예술과 서양 조형예술 전통을 융합한다.
칸딘스키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예술가는 다루어지지 않은 것을 표현하고자 노력한다고 밝힌다. 서양 예술의 전통은 이러한 특별함의 추구로 견인되어 왔고, 이러한 선호의 반작용으로 평범한 일상과 평범한 개인은 예술가와 비평가의 관심에서 벗어난 것이 사실이다. 동시에 현실의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 또한 특별한 행복과 특수한 목표에 의지하는 바, 인류사에서 평범함이 소중한 가치로 부상한 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에서 울프는 별 다를 것 없는 하루,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각자의 삶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에 특별함을 부여한다. 그는 반복되는 하루의 권태에 높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권태로 인하여 소설 속 인물들은 과거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현재의 표상을 덧붙여 새로운 과거를 정초하는 한편, 새로운 자기서사를 써 내려가는 여유를 확보하게 된다.
과거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현재에 의해 과거는 끊임없이 다시 서술된다. 현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과거에 현재의 표상을 덧붙이며,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된 과거는 인간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는 삶의 과정에서 축적된 표상의 종합이다. 만약 과거가 씁쓸하게 느껴진다면 그 까닭은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겠다. 웃으며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은 또한, 행복한 현재 덕분이겠다.
문학 작품에서 회상은 인물의 현재를 요약하여 보여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고, 현재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건 노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기에 각자의 근원적 본질에 무지하며, 그러한 까닭에 서로의 차이는 아주 작아 보인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에게서 커다란 차이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친구에게서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벽을 느낀다. 시간은 흘러 한때 현재였던 것에서 특별함을 박탈하고, 현재에 눈이 먼 인간은 과거만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자기 서술의 가능성이 내재하는 시간은 언제나 현재이기에,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 또한 현재에 있다. <미들마치>에서 현실의 변화는 ‘직업과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다. 직업과 결혼은 단번에 개인의 삶을 성공 또는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재에서 이탈하는 힘을 가진다. <댈러웨이 부인>은 동일 모티프를 차용하여 결혼과 직업 선택의 결과로 성공 또는 몰락한 인물 간의 간극을 강조하여 보여준다. 클라리사는 리처드 댈러웨이와의 결혼으로 상류층과의 친분을 넓혀 간다. 반면 피터 월시는 클리리사와의 사랑에서 도피하며 타지를 전전하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런던에 돌아온다. 당돌한 매력을 지닌 샐리 또한 자수성가한 공장주를 만나며 런던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작품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단 하루동안 모든 인물들은 클라리사와 보낸 행복한 시절을 추억한다. '직업과 결혼'이라는 과업에 성공한 클라리사는 피터와 샐리를 비롯한 옛 친구들이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사람으로 부상한다. 피터와 샐리는 성공하지 못했고, 어린 시절의 모습도 온데간데 없다. 그런 이들에게 클라리사가 상징하는 것은 인생, 가까이선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멀리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 간단해 보이는 바로 그 인생이다. 클라리사를 마주한 인물들은 넋이 나간 듯 과거를 회상하며, 이 순간 과거의 유산은 현재의 표상에 편입된다.
세상에는 존중받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다. 세상에 무관심한 사람들, 세상의 법칙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부적응자’로 낙인찍힌 사람들. 세상은 이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존중을 건네지 않는다. 슬프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유가 부족하고, 세상을 떠도는 영혼을 다독여 줄 위인도 찾기 힘들다. 각자가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현실에서 타인을 도와 줄 마음도, 용기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 셉티머스는 시인을 꿈꾸는 청년으로, 우연히 참여한 전쟁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동료 에번스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서 시작한 죄책감은 그를 억압하고,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이윽고 전쟁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그는 밀라노의 여관집에 머무른다. 여관집의 딸들은 매일 저녁 불빛 아래 이야기꽃을 피웠고, 셉티머스는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당위 논리’로 가득찬 세상에서 자신의 특이함을 망각하게 해주는 레치아와 그는 약혼을 결심한다.
모든 차이가 존중받는 밀라노에서, 모든 것이 경제성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런던으로 돌아오며 셉티머스는 불쾌함을 느낀다. ‘무엇을 해야 한다’, ‘어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은 세상과 불화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셉티머스의 결함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치아마저 아이를 갖고 싶다는 현실적인 부탁을 하게 되자 셉티머스는 마지막 희망을 잃으며 이내 자신이 혼자임을 통감한다. 넋이 나간 그를 진료하러 온 의사 홈스가 셉티머스에게 던지는 “겁쟁이”라는 말은, 문명이 자신과 불화하는 존재에 던지는 억압의 시선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셉티머스가 세상과 불화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인간으로서 마땅히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 뿐, 그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 앞에서 주저한다. 하지만 그를 억압하는 문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다. 자살을 선택하고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삶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다고 한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셉티머스의 자살은 삶에 대한 강력한 집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죽기를 원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상실하였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다.
죽음은 현실의 공간을 점유하지 않으며 다만 그 빈자리를 남긴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며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세상은 한 사람의 부재에 구애받지 않고, 여느 때와 같이 돌아간다. 죽음이 남기는 것은 다만 그 빈 자리,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공허 뿐이다. 세계의 스펙터클이 작동을 멈추는 밤이면 그 빈 자리를 볼 수 있다. 사람은 세상을 떠나며 영원히 현재로 남을 과거를 남기며, 그를 기리며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점에서 죽음은 크레센도에 가깝다.
셉티머스는 세상을 떠나며 다만 삶을 향한 열망을 남긴다. 클라리사로 대변되는 버지니아 울프 또한 삶을 사랑하고, 삶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 감행하는 자살을 긍정한다. 그의 소식을 들은 클라리사는 고민에 빠진다. 주위의 사람들을 한데 이어주고자 파티를 연 클리리사는 정작 그 누구와도 진심어린 소통을 하지 못한다. 같은 시간, 셉티머스는 삶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한다. 세상과 자아가 불화할 때, 타자와 주체가 소통하지 못할 때, 가장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을 선택한다. 그에게는 죽음이 진정한 교감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삶과 죽음은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고 있고, 그 차이는 사소하다. 작품 내에서 클라리사와 셉티머스의 차이는 '뛰어 내리다'의 맥락으로 사용된 "lark"와 "plunge"라는 단어에 집약된다. 어린 시절 바깥 공기를 맡기 위해 창 밖으로 뛰어 나가는 클라리사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는 "lark"이다. 반면, 창 밖으로 뛰어내리며 삶을 포기하는 셉티머스를 표현할 때는 "plunge"가 사용된다. 밀러의 비평에 따르면, 작품 전반에서 전자는 상승의 도약을, 후자는 하강의 도약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여기서 울프는 "lark"에 죽은 과거의 이미지를 덧붙이며 "plunge"와 밀접한 관계를 설정한다. 도약의 두 단어는 클라리사와 셉티머스 만큼의 삶과 죽음의 너무나도 사소한 차이를 보여준다. 클라리사는 삶을 사랑했고, 사랑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었다. 셉티머스는 삶을 사랑했지만 지킬 수 없었다. 삶과 죽음에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전하는 자정은, 절대적으로 현재가 결핍된 이 시간은 또한 과거가 즉각적으로 현재의 그 무엇의 중개 없이 미래의 극단을 만지며 거기에 이르는 시간이다.” 자정은 현실의 운동이 정지하는 시간이고, 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잠시 내려놓는 시간이다. 현재가 비운 곳에 과거 자체가, 아니 어쩌면 과거는 사라지고 대신 남은 과거의 빈 자리가 무뎌진 감각을 다시금 자극하는 이 순간에, 답을 찾지 못한 고민이 이유를 발견하고, 감성은 또 다른 직관을 보편화한다. 세상에 먼저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 말하는 뻔한 격언이 공감할 수 있는 진리로 느껴지는 이 시간은 자정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순간도 밤이다. 여느 날처럼 일찍 잠에 들기를 거부하고 어머니의 키스를 갈구하다 처음으로 죄책감을 갖게 되는 시간도, 여기에서 출발해 익숙한 인연들을 한 자리에서 다시 마주하며 과거의 현전을 경험하는 일련의 기억을 회상하는 시간도 밤이다. 괜한 생각에 잠 못 이루는 것도, 그래서 펜을 잡게 되는 것 또한 밤의 소관, 마법같은 힘으로 ‘한여름밤의 꿈’은 새로운 글을 쓰게 해준다. 그렇기에 밤을 배경으로 과거를 회상함에는 어려움이 없다.
반면 낮은 현실의 시간, 잠자고 있던 현실의 법칙이 공간을 다시 점유하고, 부재하는 것을 붙잡아둘 수 없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에 울프의 인물들은 여하한 이유들로 현실의 거대한 운동성에 역행한다. 그들을 찾아오는 과거의 기억은 빈 공간을 찾아오는 망령이라기보다는 인물들 개인이 현실의 경제 원리와 상충하는 데서 역동적으로 얻어내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성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물론, 작품에서 <장승곡>이 환기하는 만령절은 클라리사에게 피터 월시와 샐리 시턴을 비롯한 죽은 인물들을 소환하는 의식처럼 기능한다. 다만 이는 ‘밤’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스펙터클이 정지하는 시간에 부재하는 것들이 그 빈 자리를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의 시간 위에 부재하는 것들이 덧붙여지는 것으로, 이들을 통하여 더욱 다채로운 표상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댈러웨이 부인>의 마지막 파티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연회와는 다른 씁쓸함이 느껴진다. 후자에서 마르셀은 어른이 된 자신과 어느새 너무 멀어진 타인을 새롭게 포용하며 또 다른 인격체로 거듭난다. 반면 <댈러웨이 부인>에서 셉티머스는 자살을 선택하고, 클라리사는 셉티머스에 공감하면서도 방 너머에 존재하는, 삶을 위해 자리를 뜬다. 그녀의 옛 친구 피터와 샐리는 어느새 자신들과 너무 멀어진 클라리사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댈러웨이 부인>에서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소재인 파티는 과거의 표상이 마구 뒤섞이며 새로운 미래를 그려나가는 희망을 주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은 파티를 통해 각자의 삶을 다시금 돌아보며 인생에 대한 각자의 깨달음을 새롭게 얻을 뿐이다.
현실의 시간을 거스르는 인물들은 과중한 업무가 밀려오는 비즈니스맨의 세계와 마찰하며 획득한 본인의 처지에 대한 자각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과거의 재인식은 본인과 타자의 간극을 극대화하는 도구로서 활용된다. 그렇기에 작품은, 비록 클라리사의 존재를 다시금 느끼는 피터의 독백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부재를 틈타 사라진 존재를 추억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의 법칙 아래서 인물들이 불화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방식은 소설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단 하루를 배경으로 하는 일종의 미니멀리즘 내러티브를 가져가면서도 맥시멀리즘의 효과를 성취하는데, 이는 울프가 서사에서는 미니멀리즘을 선택하였음에도 그 서술에서는 낮의 시간에 의지하며 현재와 과거가 적극적으로 경쟁하도록 유도한 까닭에서다.